강재남의 포엠산책(87)폭설(권서각)

2023-01-08     경남일보
강재남의 포엠산책(87)폭설(권서각)
 

 



이따금 폭설이 내려

집과 집으로 난

마을과 마을로 난

길을 지워버리는 것은

그리하여 너와 나를 오도 가도 못하게 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이 그리 쉽게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려 하심이다

그리하여 그리움의 전용도로인

하얀 길을 만들게 하려 하심이다

그리하여 눈이 녹을 때까지

밤새워 긴 편지를 쓰게 하려 하심이다

그리움의 자음과 모음이

맨발로 하얀 길을 가게 하려 하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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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산책…… 겨울은 깊을수록 이야기가 많아요. 폭설에서는 더욱 그러하지요. 모든 길을 지우고 우리 발을 꽁꽁 묶는 밤엔 어둠이 더 소곤소곤해집니다. 엄마는 이야기꾼이었어요. 조선시대 책 읽어주는 전기수 같았죠. 목소리에 다양한 감정을 실어서 이야기를 하면 금방이라도 호랑이가 마당을 어슬렁거릴 것 같았고 앞산 도깨비가 마루에 걸터앉아있을 것 같았어요. 이야기를 잘하는 것도 타고나야 하는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듣고 자란 게 이야기인데 세상 재밌는 것도 세상 재미없게 하는 게 제가 말하는 방식이거든요. 대신 일기를 쓰거나 편지를 썼죠. 미지의 나에게 쓰는 글은 긴긴 겨울밤을 다 까먹고도 다음 날로 이어졌어요. 이렇게 어떤 시는 이미지만으로 충분히 공감되면서 추억을 불러오는 매개 역할을 합니다. ‘폭설’을 읽으며, 눈에 덮인 마을이 그린 듯 고요하던 어린 날을 떠올립니다. 그리움이 맨발로 걸어가는 하얀 밤은 애틋했고요. 잡을 수 없는 많은 것은 간절함으로 다가왔죠. 오늘은 뜻밖의 폭설을 만나 그때로 다니러 갈까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