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영남 선비의 뿌리, 덕곡의 수양명월, 율리청풍

강신웅 전 경상국립대학교 교수

2023-01-17     경남일보


조승숙은 고려 공민왕 7년(1357년)함양 출신으로 호는 덕곡이다. 시조는 고려조에서 문하시중평장사였던 조정이고 부친은 영돈정을 지낸 조경으로, 대대로 전통 있는 가문이었다.

조승숙은 약관에 사마시와 문과에 급제해 저작랑(왕의 직속 문서 작성 담당관)에 임명된 뒤 중국 조정에 들어간다. 거기서도 장주(章奏·중국 왕에게 올리는 글)를 잘 지어 중국 사람들을 놀라게 하니, 이에 중국황제가 자금어대까지 하사했다고 한다.

귀국한 뒤에도 그러한 공적으로 고려왕으로부터도 침향궤라는 영예로운 어사품을 하사 받았고, 벼슬하는 중에도 여가에는 포은 정몽주에게 나아가 성리학을 했으나 고려가 조선조에 망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신으로 그는 곧장 두문동으로 들어갔다. ‘바뀐 나라의 하늘 밑에서는 더 이상 머물 수도 없고. 또한 그 공기마저도 마실 수 없다’는 충절심의 발로로 고향인 함양 덕곡으로 내려갔다.

덕곡에서는 교수정이라는 교육당을 손수 짓고 머물면서 후학을 양성하며 평생 은거하는 진정한 은일도락(隱逸道樂)의 삶을 지켰다. 그래서 후대인들은 그의 삶을 백이숙제에 비유하고, 또 고향 율리에 은거했던 중국 동진의 도연명에 비겼다.

특히 그는 ‘두문동칠십이현’ 중의 한 사람으로서 무너진 고려왕조에 대한 충절심이 누구보다도 강렬했음이 여러 문헌을 통해 전해온다. 낙향 후 교수정에서도 바깥출입도 일체 하지 않고, 외부사람 누구와도 만나지 않았다. 오직 고려조의 동료 충절충신인 야은 길재와 몇 차례 시문으로만 교류했던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그는 그의 교수정으로 계속 몰려오는 제자들에 대해서도 신분과 학력을 철폐한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평등교육을 실현했다. 소위 ‘수양명월 율리청풍’(首陽明月 栗里淸風·수양산 밝은 달처럼 절개를 지킨 백이숙제와 같고, 율리에 은거하며 맑은 바람처럼 살았던 도연명과 같도다)과 같은 절조와 은둔의 도를 실천 했다. 그 결과 그의 이러한 선비로써 혹은 군자로써의 태도는 올곧은 그의 투철한 충절심과 함께 후대로 계속 이어지면서 명실공히 조선조 최고 영남 성현선비들인 점필재 김종직, 일두 정여창 그리고 남명 조식 등과 같은 위대한 충절선비들이 계속 출현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조승숙의 그토록 강인했던 충절정신이 오늘날 ‘우함양 정신 즉 영남충절 선비 정신’의 그 뿌리가 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