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 영남의병, 그 충혼 영원하리라

강신웅 경상국립대학교 명예교수

2023-01-25     경남일보


지난해 10월 진주시와 진주문화원에서는 430여 년 전 진주성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한 전국 임란 의병들의 후손들을 진주성에 초청해 매우 의미있는 행사를 개최했다. 현대인들에게 그 옛날 그 분들의 진정한 애국 애향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시키고자 함이다. 우리나라에서 대규모 의병이 조직적으로 활동했던 때는 임진왜란(1592∼1598) 7년 동안이다. 당시에는 주로 진주를 중심으로 의병운동이 매우 왕성했으나 현재까지 진주목에서 임란의병의 활동에 대한 관련 사료가 거의 없는 실정이다. 당시 경상우도관찰사로서 초유사였던 김성일의 초유로 허국주, 하계선, 최언량, 윤사복, 정유경, 손승선, 하천서 등 현재 창렬사에 배향돼 있는 진주출신 의병들 몇 분의 활동기록만이 ‘진양지’에 일부 간략하게 기록돼 있을 뿐이다. 또 다른 기록에 따르면, 일찍부터 경상우도의 망우당 곽재우는 일본이 침략한 10일 만인 1592년 4월 22일 전국에서 제일 먼저 본인의 많은 재산을 헌납하고, 또 집안의 노비 10명만으로 의병을 일으킨 후 잠깐 사이에 수천 명까지 늘어났다고 돼 있다. 당시 곽재우를 비롯 정인홍, 김면 3대 의병장의 활약이 특출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의병운동은 경상도에서 제일 먼저 대규모로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공인된 자료에 의하면 1593년(선조26년) 1월 조선 조정의 공식적인 전국 전투병력 조사 통계에 당시 관군 13만 6700명, 의병 2만 3000명으로 이 중 경상우도 의병이 1만 명으로 전국 의병의 절반에 육박한다. 의병의 전과는 지역별로 산발적이었지만 구체적 내용은 제대로 파악할 수는 없는 실정이다. 분명한 것은 1592년 10월 영남의병들의 역할로 왜군의 낙동강 방어선과 진주성 대첩을 이룸으로써 왜군의 호남진입 차단과 함께 호남에 보유 중인 군량을 비롯한 군수, 민수물자의 수송 등 병참보급을 원활하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을이나, 지역단위로 조직된 크고 작은 의병부대들은 지역의 지형을 잘 이용해 기습, 야습, 유인 등으로 낙동강 방어와 후방교란으로 북상하는 왜군의 병참물자 보급을 차단해 임란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금번에 진주시와 진주문화원에서 개최한 참전 의병도시들 간의 문화원 업무협약과 함께 시행된 진주대첩과 계사년 진주에서 순절한 7만 민 관 군 충절의 상징인 진주 창렬사 제향의 국가제향 승격을 위한 학술대회, 그 또한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