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광임의 디카시 행진 101] 노천명의 데칼코마니 (이상옥 시인)

2023-02-02     경남일보
노천명의 데칼코마니
 


아프리카 초원의

잃어버린 전설을 생각하는

사슴보다 더 슬픈 모가지



-이상옥 시인, ‘노천명의 데칼코마니’



노천명의 시 ‘사슴’ 후반부의 시적 의미는 이렇다. 사슴은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다가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몰려오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이 사슴을 노천명은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라고 했다. 이 문장을 떠올릴 때면, 우리는 의례 노천명의 ‘사슴’을 연상하고 반대로 ‘사슴’을 생각할 때도 이와 마찬가지가 되었다. 곧 사슴은 슬픔과 등가가 된다. 시인의 언어가 힘이 센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질적인 것들을 합쳐 익숙한 이미지로 일반화하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노천명의 데칼코마니’는 사슴 대신 기린을 차용하여 사슴=슬픔이란 일반적 이미지를 약화한다. 기린이 ‘사슴보다 더 슬픈 모가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사슴이 물속의 환영을 통해 슬픔을 인지한 것이라면, 기린은 데칼코마니라는 복사 방식으로 우연이나 비합리적 표현의 무의식적 슬픔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두원공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