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왕봉]기휘 피휘

한중기 논설위원

2023-02-15     경남일보
고려 태생 이성계는 1392년 조선을 건국한 왕이 되면서 ‘이단(李旦)’으로 개명했다. 2대 왕 정종이 된 이방과 역시 ‘이경’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역대 조선 임금 중에서 가장 유명한 세종(이조)과 정조(이산)도 왕이 되기 전 외자로 이름을 바꾸었다. 태종 이방원과 단종 이홍위 둘만 빼고 조선의 모든 왕 이름은 외자였다.

▶왕조시대 절대 존엄인 왕의 이름은 함부로 말할 수도 쓸 수도 없었다. 백성이 같은 이름자를 쓴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고, 음이나 뜻이 같아서도 안 될 일이었다. 백성들은 어쩔 수 없이 왕 이름이 들어간 글자를 피해서 이름을 지었다. 해서, 조선의 왕들은 백성의 불편함을 덜어 주기 위해 잘 쓰지 않는 한자로 외자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한자문화권에 ‘기휘(忌諱)’ 또는 ‘피휘(避諱)’라는 유교적 전통이 있었다.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휘’는 ‘꺼리다’는 의미도 있지만 ‘이름’을 뜻한다. ‘기’와 ‘피’를 합치면 ‘기피’가 된다. 왕이나 성현의 이름은 언급 자체가 불경죄에 속했다. 제 이름조차 마음대로 지을 수 없었던 어처구니없는 관습이 아닐 수 없다.

▶북한 당국이 최근 김정은의 딸 김주애 우상화에 나서면서 ‘주애’라는 이름의 여성들에게 개명을 강요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관영매체들은 주애 이름을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존귀하신 자제분’ ‘존경하는 자제분’으로 칭하고 있을 정도다. 가관이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에 이어 4대 째 이어지는 21세기 북한판 피휘를 역사는 어떻게 기록할지 궁금해진다.
 
한중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