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남의 포엠산책(91)정물화(홍일표)

2023-03-12     경남일보
정물화(홍일표)
 

 

연못이 거위를 번쩍 들었다 놓는다
날아가지 못하는 거위의 일생이 주르르 흘러내린다

물에 띄워 놓은 한 덩이 두부처럼
거위는 후회하지 않아서 다시 거위가 된다

연못을 잠그고
물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새와 거위 사이가 멀어져서 날이 저물었다

창문이 많은 봄이었는데
들길 산길에 색색의 기분들이 흘러 다니는 봄날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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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요. 그런 날이 있었어요. 들길 산길에 색색의 기분이 흘러 다니는 봄날을 보던 거요. 봄의 안색을 가진 창문들은 구속되지 않은 생기로움으로 가득했어요. 그때 나는 젊었고 자유로웠죠. 시간이 영영 내 것인 줄 알았어요. 이제 봄은 하나씩 창문을 없애고 박제된 삶을 택해요. 수채화 같던 생이 유화로 덧칠되어요. 그럼에도 갑갑한 느낌이 없으니 이 또한 편안한 삶인가 보아요. 젊은 날을 다 보낸 내가 고즈넉한 노년을 맞고 싶은 거예요. 이렇게 ‘정물화’를 거꾸로 읽었어요. 정지된 삶을 먼저 보았고요. 날개가 있어도 날지 못하는 거위가 보였어요. 거위에게 무한의 자유를 주었어요. 한 덩이 두부처럼 살 기회를요. 하지만 거위는 안온한 삶이 좋다고 해요. 그런 거위에게 타성에 젖지 말라 질책할 생각이 없어요. 새였다는 사실을 망각한 거위처럼 나도 많은 걸 잊고 싶거든요. 잊을 일과 흘려야 할 일을 잘 챙겨서 보내야 한다는 걸 알아요. 그러하기에 연못이 세상이고 자유인 거위를 이해하기로 해요. 일생이 저물어 정물화가 되면 어때요. 색색의 생을 다 살고 돌아와 거기 가만히 있고 싶은 내가 거위라는 걸 알겠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