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왕봉]방랑

정재모 논설위원

2023-03-16     경남일보
 
야사에 따르면 김삿갓은 16살에 자기 조부를 나무라는 글로 향시에 급제했다. ‘선대왕이 보고 계시니 너는 구천에도 못 간다. 한 번의 죽음으론 가볍고 만 번 죽어 마땅하다. 네 치욕은 우리 동국 역사에 길이 웃음거리로 남으리.’했다. 역적 김익순을 논핵하라는 과제(科題)에 적어낸 글이었다. 이 글은 그가 평생 방랑하는 계기가 되었다.

▶난적 홍경래에 항복하고, 임금을 속인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인 줄 모르고 쓴 글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충격이 그토록 컸을까. 조선시대 양반 관료의 길을 내버리고 자신을 학대했다. 57세 전 생애에 걸쳐 삿갓 속에 숨어 걸식 방랑토록 한 건 가계(家系)에 대한 부끄러움 또는 자신의 글에 대한 자책감이었을 게다.

▶고 전두환 전 대통령의 손자 하나가 자기 아버지를 비롯하여 일가 전체를 비난하는 글을 인터넷에 올려 화제다. 집안 사람들이 출처 모를 검은 돈을 쓰고 있다고 주장하고, 아버지는 법 감시망을 벗어나기 위해 전도사라는 사기행각을 벌이고 있다고 퍼부었다. 숙부는 미 캘리포니아에서 어마어마한 돈으로 와이너리를 운영하고 있다고 쓰기도 했다.

▶조부모인 전 전대통령 내외에 대해서는 ‘반성하셔야 한다’고 했다. 그의 아버지 전재용 씨는 ‘아들이 많이 아프다’며 아들을 돌보지 못한 애비의 잘못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고 한다. 법이 정의를 구현하지 못해 자기 가족을 저격하고 있다는 그 젊은이 말의 당부(當否)는 알 수 없다. 김삿갓처럼 방랑의 길에 오른 걸까. 사람의 잘못은 먼 자손에까지 후과가 미친다는 옛말을 새삼 생각케 하는 일들이다.
 
정재모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