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초임지는 처가동네가 된다

박금태 마산중부경찰서 112상황실 과장

2023-03-19     경남일보
 


30여 년 전 나는 중앙경찰학교를 졸업하고 서부경남 중심도시인 진주에 배치를 받았다. 흔히 진주라 하면 도심지만을 생각할 수 있겠지만, 과거 진양군은 면 단위 파출소가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남쪽 면 단위 파출소에 초임 순경으로 첫 발령 받은 날 빨간색 완행버스를 타고 도착했고, 나를 반겨준 선배 경찰관들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근무형태는 전일제로 일주일 내내 긴 시간 동안 근무했고, 사무실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 개인시간은 적은 편이었다. 그래도 지역 내 사정에 빨리 적응할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새벽녘에 수박하우스 도난예방 순찰을 하다가 농업인들과 만나서 “감동이다”고 칭찬을 들었던 일, 휴무 날 인정 넘치는 주민들의 농사일을 거들던 일 등 초임지에서의 추억이 많아져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아 있다. 동기들 모임에 가서도 자신들의 초임지 생활이 회자되는 이유가 이러한 이유인 듯하다.

나는 초임지가 처가 동네가 되면서 더욱 기억에 남는다. 당시 면사무소 직원이었던 집사람을 만나게 된 것도 선배 경찰관과 어른들의 소개가 있었기에 결혼까지 이어졌다. 처가에서의 기억을 떠올린다면 처가 할머니로부터 받은 사랑이다. “당신의 따님과 결혼 시켜주십시오”라며 처음 처갓집을 방문하던 그날, 어둑어둑한 초저녁임에도 마을입구 정자나무까지 걸어 나오셔서 손주사윗감을 기다리고 계셨다. 왕래가 거의 없는 시골 저녁이라 그런지 단번에 알아보시고 “자넨 내 손주 사위가 될 사람이 맞네” 라며 두 손을 잡아 주셨다. 그리고 군불 땐 아궁이 큰 방에 찐 고구마와 동치미를 상 위에 놓고 장인 장모 되실 분과 마주앉았다.

내 바로 옆에 붙어 앉으신 할머니는 “저 짬치(저쪽) 뜨신 데로 가세…응” 하시면서 나를 아랫목으로 밀었다. 결혼승낙을 위해 꿇고 있던 무릎은 따뜻하다 못해 뜨거워 지금의 찜질방 같은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결혼 이후엔 매번 쌀을 보내주시거나 싸주셨다. 이에 보답코자 모내기와 추수 날에는 처가를 방문하는 일이 일반적이었다. 처가에서 할머니를 마주하면 “이리와 내 좀 보세”라면서 산에서 땄다는 영지버섯을 봉지에 넣어주시며 “물 끓여 먹어라” 하시던 것이 생각난다. 할머니는 구순 중반의 연세에 가을 어느 추수 날까지 건강하게 거동하시다가 그 다음날 편하게 하늘나라로 가셨다. 수십 년이 지났지만, 그때 할머니로부터 받은 따뜻한 사랑이 아직도 처가에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