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왕봉]멸치

변옥윤 논설위원

2023-04-17     경남일보
정약전의 자산어보는 멸치를 아주 하찮은 생선으로 기록하고 있다. 바다 먹이사슬 최하위층을 형성해 남해안 어디서든 지천으로 잡힌 탓이리라. 오늘날 모든 국물 요리와 양념에 빠져서는 안되는 귀한 대접을 받고 있는 것과는 격세지감이 있다. 멸치 없는 한식요리는 상상불허다.

▶멸치잡이는 정치망과 유자망은 물론 대량으로 잡는데는 기선권현망이 제격이다. 어탐선과 본선, 가공운반선 등 5척의 선박이 선단을 이뤄 성어기에는 바다에서 몇달씩 어로작업에 매달린다. 옛날에는 물살이 빠르고 수심이 얕은 바다에 V자형으로 대발을 쳐 물고기를 가두어 잡는 죽방렴이 대세였다. 지금도 남해안에선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요즘 남해 미조항에는 멸치털이가 한창이다. 젓갈용 멸치가 풍어를 이뤄 파시를 기대하고 있다. 회로도 즐기고 묵은지와 함께 조리하는 찌개가 봄철 미각을 돋우는 인기 식단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세멸, 자멸, 소멸, 대멸로 구분, 값이 천양지차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멸치의 덕을 톡톡히 본 사람이다. 정보기관의 서슬 시퍼런 정치자금에 대한 감시의 눈에도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멸치잡이 아버지의 지원 덕분이었다. 그래서 ‘민주멸치’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요즘 더불어민주당이 돈봉투 수수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국회의원 수십명이 연루됐다고도 한다. 돈의 출처도 궁금해진다. ‘민주멸치’가 부럽게 됐다. 정치에선 구린내가 진동하지만 남해 미조항은 지금 싱싱한 멸치를 즐기려는 미식가들로 붐빈다.
 
변옥윤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