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남의 포엠산책(95) 파꽃(이문재)

2023-05-07     경남일보
파꽃(이문재)

 



파가 자라는 이유는

오직 속을 비우기 위해서다

파가 커갈수록

하얀 파꽃 둥글수록

파는 제 속을 잘 비워내는 것이다

꼿꼿하게 홀로 선 파는 속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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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이 넓은 우리 집 아래채에 텃밭이 있었어요. 거기엔 양념에 쓰일 마늘과 파와 고추가 자랐고요. 노는 담벼락에는 오이 덩굴도 있었지요. 살진 햇발 늘어지는 늦은 봄이었던 것 같아요. 파꽃이 오종종 피었던 것은요. 건강한 줄기를 보면서도 어쩐지 슬펐던 기억이 남아 있어요. 특유의 매운 냄새를 참으면서 파꽃 앞에 쪼그려 있던 기억은 오래된 기억이면서 언제나 오늘 일 같아요. 필 때가 절정인 다른 꽃들에 비해 파꽃은 생의 막바지에서 피어요. 꽃이 피면 대가 질겨지고요. 더 이상 먹거리로서의 소용이 없어져요. 자신의 속을 긁어 대를 세우고 흰머리를 올리는 동안 마음은 질겨지고 비워지면서 수명을 다하는 거죠. 그러고는 까만 씨를 내어주죠. 다음 해 파종을 위해 엄마는 씨를 골랐어요. 파꽃씨를 고르면서 엄마는 당신의 생이 파꽃과 닮았다는 걸 알았을까요. 대가족의 매무새를 챙기느라 짓물러진 속이 얼마나 쓰리고 아팠을지, 제 속을 잘 비우고 꼿꼿하게 선 파에서 엄마 모습이 보여서 슬펐나 봅니다. 시골길을 나서니 먼 풍경처럼 파꽃이 피었더군요. 꽃대가 가지런하고 명랑하게 보였어요.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엄마는 이제 다른 세상에서 파꽃씨를 고르고 있으려나요. 파에서 나는 알싸함에 눈물이 고입니다. 엄마가 봄날처럼 환한 얼굴로 손을 흔들어 주는 듯합니다.

통영문학상운영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