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조용한 일

김은영 경남도립남해대학 교수

2023-11-12     경남일보

 

낙엽 한 잎 조용히 내 곁에 내려앉는다. 아무 일도 아닌 일이다. 계절이 깊어져 가을이 됐고, 가을이 되면 세상의 모든 나뭇잎은 철이 이르거나 늦거나 잎잎이 낙엽이 되어 떨어진다. 그런데 그런 아무 일 아닌 일이 조용히 지금 내 곁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그 순간 이 일은 아무 일이 아닌 일이 돼버린다.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 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 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김사인, 조용한 일

며칠 전 지인이 단톡방에 공유해 준 김사인의 시다. 가을 저녁 ‘그냥 있어 볼 길밖에’ 하릴없는 내가 아무 곳에나 앉아 있는데, 문득 낙엽 한 잎이 슬며시 내려와 앉는다. 그리고 말없이 나와 같이 있어 준다. 그 순간 낙엽에게서 느끼는 고마움. 그저 부스러질 수밖에 없는 존재끼리의 공감이 나와 낙엽 사이를 이어주면서 외롭고 허망한 순간을 이겨낼 힘을 얻게 해준다. 시인은 아마도 낙엽에게서 위로를 얻었을 것이다.

고전물리학에서는, 너무나 당연히, 세상의 모든 물질은 다 자기의 질량을 갖고 일정한 시공간적 위치를 갖는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나는 나일 뿐이고 낙엽은 낙엽일 뿐이다. 개체로서 나는 혼자 태어나고 혼자 자라고 혼자 늙어간다. 낙엽도 마찬가지다. 내게 허락된 시간이 다하면 언젠가 그저 사라지게 된다. 단지 낙엽이 더 빨리 떨어지고 더 빨리 바스라질 뿐이다.

며칠 전 문화재청이 ‘포항 금광동층 신생대 화석산지’ 일대를 천연기념물로 지정 예고한다는 뉴스를 읽었다. 관련 자료에서 길이 10.2m의 거대 나무화석 서껀(∼이랑) 메타세콰이아, 너도밤나무, 단풍나무, 참나무 등 60여 종의 나뭇잎 화석을 볼 수 있었다. 모두 신생대 전기 마이오세(Miocene) 화석으로 약 2000만 년 전의 것이다.

문득 가슴이 뭉클해졌다. 2000만 년 전 나뭇잎이 잎자루와 미세한 잎맥까지 생생한 모습으로 나를 만나러 온 듯 보였다. 그 긴 세월을 돌아 내 앞에 나섰을 때는 분명 뭔가 이유가 있겠지.

지금 내 곁에 문득 슬며시 내려앉은 나뭇잎과 2000만 년 긴 세월을 오래오래 기다려 화석이 된 나뭇잎. 두 나뭇잎이 똑같이 감동적이다. 외롭고 유한한 이 고전물리학의 세계에서 하릴없는 내 곁에 말없이 조용히 다가와 준다. 힘내라는 뜻이겠지. 고맙다. 힘내야겠다. 이런 생각이 조용히 가슴 속으로 밀려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