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김장하는 날

정두경 갤리러DOO 대표

2023-12-14     경남일보


김장하는 날은 1년에 단 하루 우리 가족의 협업이 이루어지는 날이기도 하고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가락시장에 1년에 딱 한 번 가는 날이기도 하다.

요리도 제대로 할 줄 몰랐던 신혼 무렵부터 김장을 하며 호기롭게 동치미에 백김치까지 담궈먹었는데 일을 시작하고부터 한동안 친정과 시가 양가에서 김치를 갖다 먹었던 시절도 오래 전 일이 되었다.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께서 연로해져 더 이상 김치를 못 얻어 먹게 되면서 다시 김장을 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100세 친정어머니만 계시고 시어머니는 2년 전 세상을 떠나고 안 계신다

남편과 가락시장에 가서 무와 갓, 쪽파, 생강, 청각 등을 사고 멸치젓을 사러 1년에 한 번 가는 젓갈 집에 들렀다. 불현듯 10년 전에 그 가게에서 만난 노부부가 떠올랐다. 연세가 꽤 되신 할머니가 새우젓을 사고 있었고 주인이 할머니께 계산이 안됐다고 하자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때까지 눈에 띄지 않던 할아버지가 어디선가 나타나 만 원짜리 지폐 여러 장을 손에 들고 얼굴 가득 미소 지으며 말을 던졌다.

“돈 근심은 하지 마소.”

아! 그 말이 어찌나 신선하던지, 그리고 그 할아버지의 미소가 얼마나 유쾌하고 아름답던지. 허리 굽은 노부부의 다정했던 동행은 김장하는 날 가락시장 젓갈집을 가면 10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진 기억 속에서 불쑥 떠오르곤 한다. 할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디선가 나타나는 할머니의 영원한 홍반장이었을 할아버지! 그 분들이 아직도 건강한 모습으로 행복한 동행을 하고 계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진도에서 공수한 절임 배추는 길이가 짧고 속이 노랗고 고소하다. 전라도 끝의 진도에서 올라온 배추에 진주에서 온 고추가루와 마늘을 넣고, 또 어딘가에서 어느 농부의 정성과 수고로 탄생된 각종 김장 재료들을 한데 버무려 김치를 담는 일은 어찌 보면 숭고한 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내일 부산 출장길에 진주 어머니께 들러 막내딸이 만든 김장김치를 맛보여 드려야겠다는 생각으로 김치를 담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