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남서 전쟁 피해 내려온 피난가족…민주화 운동 두번 구속
재수로 법대 진학 참여정부 비서실장·민정수석 지내
재수로 법대 진학 참여정부 비서실장·민정수석 지내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문재인 후보의 인생은 그의 자서전 제목처럼 ‘운명’과도 같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만나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고 ‘정권 2인자’에 올랐지만, 정치와는 한사코 담을 쌓아왔던 그가 권력의 최정점에 오른 것은 역설에 가깝다.
학생운동 탓에 판사 임용이 좌절돼 변호사의 길로 들어선 것도, 홀로 계신 노모를 모시러 부산행을 택했다가 노 전 대통령을 만난 것도, 노 전 대통령의 서거로 정치에 입문하며 두 차례 대권에 도전한 것도 그에겐 운명이었다.
권력욕이 없었기에 순수하게 보였을 수 있었지만 ‘어정쩡한’ 모습이 오히려 그의 발목을 잡았다. 노 전 대통령 밑에서 민정수석과 비서실장을 지내면서 ‘폐족 친노’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진 채 ‘자의 반 타의 반’ 현실정치에 몸을 담갔지만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석패했다.
그가 ‘정치 신인’의 티를 벗으며 와신상담한 건 이때부터다. 친노(친노무현)에 이어 친문(친문재인) 패권주의라는 프레임이 끝없이 괴롭혔지만, 그는 오로지 국민만 바라봤다.
제1야당 대표를 거치며 분당(分黨) 사태로 무너지던 당을 재건해 작년 4·13 총선 승리를 이끌었다. 탄핵 정국 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 치열했던 경선에서 ‘적폐청산’과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을 내걸고 안희정 충남지사와 이재명 성남시장이라는 걸출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두 번째 본선에 뛰어들어 결국 대권을 거머쥐었다.
기쁨도 잠시, 그의 앞에 놓인 짐은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가볍지 않다. 국정농단 사태로 갈기갈기 찢긴 국민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 곤두박질치는 경제와 갈수록 팍팍해지는 국민의 삶,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계획) 문제로 미국과 중국 사이에 선 외교전, 북한의 도발로 인한 한반도 위기 그 무엇하나 간단치 않다.
앞으로 펼쳐질 여소야대 지형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면서 개혁 입법과 국민 통합을 동시에 완수해야 할 무거운 책무도 고스란히 그의 몫이다.
◇거제서 태어나 부산서 자란 가난한 소년 = 문 당선인은 1953년 1월 24일 경남 거제군 명진리 허름한 시골 농가에서 2남3녀 중 둘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함경도 흥남이 고향인 부모가 1950년 12월 흥남철수 때 잠시 중공군을 피한다는 심정으로 별 준비 없이 미군 함정에 몸을 실었던 게 실향의 한(恨)으로 이어졌다.
초등학교 입학 무렵 부산의 대표적인 달동네였던 영도로 이사했다. 성당에서 나눠주던 구호물자를 받으려 양동이를 들고 긴 줄을 서야 했던 가난은 여전했다. 모친의 연탄배달일을 돕다 리어카 채로 길가에 처박힌 일은 지금도 생생하다고 한다.
그는 자서전 운명에서 ‘돈이라는 게 별로 중요한 게 아니라는 지금의 내 가치관은 오히려 가난 때문에 내 속에 자리 잡은 것이다. 아마도 가난을 버티게 한 자존심이었을지 모르겠다. 그런 가치관은 살아오는 동안 큰 도움이 됐다’고 술회했다.
문 당선인은 지금도 자전거를 못 탄다. 어린 시절 자전거를 살 돈도, 배울 시간도 없었던 탓이다. 그래서 공부만 했고, 명문 경남중·고에 입학했다.
중학교 때 부유한 친구들을 보며 세상의 불공평을 느꼈다고 한다. 이 시절부터 독서에 빠졌다. 학교 도서관에 맨 마지막까지 남아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급기야 사상계 같은 사회비평 잡지로까지 영역을 넓혔다.
고교 시절 성적은 좋았지만 공부만 하는 모범생은 아니었다. 고3 때 술을 마시고 담배도 배웠다. 싸움에 말려들어 의리를 지키려다 정학을 당하기도 했다. 이름 탓에 ‘문제아’ 별명이 붙여졌지만 네 번의 정학을 받은 ‘문제학생’이었다.
◇민주화운동으로 두 번 구속…유치장에서 사시 합격 통보 = 역사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부모님과 선생님의 권유로 서울대 상대를 지원했다가 낙방해 재수 끝에 1972년 경희대 법대를 4년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그 시절이 그랬듯 대학생 문재인은 ‘반유신’ 운동권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대표적인 공안 조작 사건인 민청학련·인혁당 사건 당시인 1974년 문 당선인은 학내 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돼 구류처분을 받았다. 그게 시작이었다.
이듬해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의 사형을 계기로 대규모 시위를 이끌다 구속되고 학교에서 제적됐다. 그해 석방과 동시에 강제징집돼 특전사에서 군 생활을 했다. 당시 특전사 여단장이 전두환 전 대통령, 대대장이 장세동 전 안기부장이었다.
문 당선인은 폭파과정과 화생방 최우수 표창을 받을 정도로 특A급 사병이었다. 상병 때는 북한이 일으킨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대응작전에 투입되기도 했다.
1978년 제대 직후 부친을 잃은 회한으로 전남 해남 대흥사에서 고시공부에 매달려 1979년 사시 1차에 합격했다.
1980년 학교로 돌아온 문 당선인은 사시 2차를 치르고 경희대 복학생 대표로 ‘서울의 봄’ 한가운데에서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어 또다시 구속되고 만다.
그해 5월 서울역 앞 시위에서 발생한 경찰 사망사건 참고인으로 조사받느라 미결수로 경찰서 유치장 생활을 하던 중 사시 합격 소식을 들었다. 차석이었다.
당시 경찰서장은 축하차 면회를 온 학생처장과 법대 동창회장을 유치장 안으로 들여보내 조촐한 소주 파티를 허가했다. 경찰 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연수원 ‘차석’에도 판사 좌절…인권변호사 길서 노무현과 운명적 만남 = 사시 합격으로 난생처음 ‘평탄한 길’로 들어섰다. 7년 연애 끝에 부인 김정숙씨와 결혼해 1남1녀를 뒀다.
고 조영래 변호사·박원순 서울시장·박시환 대법관·송두환 헌법재판관·고승덕 변호사 등 쟁쟁한 동기들이 즐비했지만,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수료했다.
판사를 지망했지만 시위전력으로 좌절됐다. 대형로펌 스카우트를 거절하고 부산행을 택했다. 억울한 사람들을 대변하고 싶었기도 했지만, 부산에 홀로 계신 어머니를 모시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1982년 노 전 대통령과 운명적 만남의 시작이었다.
의기투합한 두 사람에게 각종 인권·시국·노동 사건이 몰렸다. 그는 ‘대한민국이 묻는다’ 저서에서 ‘인권변호사의 길을 간 이유는 변호사가 단순히 밥벌이 수단이 되어선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라고 적었다.
재야운동에 발을 들인 문 당선인은 부산·경남 민변을 창립하고, 부산변호사회 인권위원장·천주교 인권위원회 인권위원·부산 YMCA 이사와 노동자를 위한 연대 대표를 맡았다. 1985년 부산민주시민협의회를 창립하고 6월항쟁 때인 1987년 부산국본(부산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을 결성, 상임집행위원을 맡아 부산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다. 노 전 대통령이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았다.
1988년 노 전 대통령은 13대 총선에 출마해 정치권에 들어섰지만, 문 당선인은 노동문제 변호사 길을 이어갔다. 노 전 대통령이 당선된 2002년 대선 경선 때 문 당선인은 노 후보의 부산선대본부장을 맡으며 두 사람은 재결합했다.
노 전 대통령은 생전 문 당선인을 ‘친구’라고 불렀다. 2002년 대선 후보 당시 연설에서는 “사람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 친구를 보라고 했다. 제가 아주 존경하는 믿음직한 친구, 문재인을 친구로 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나는 대통령감이 된다. 나는 문재인을 친구로 두고 있다. 그는 성공했지만 군림하지 않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오늘도 돕고 있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오늘도 수고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참여정부 ‘왕수석’…盧곁 지킨 ‘친노적자’ = 문 당선인은 참여정부의 시작과 끝을 함께했다. 민정수석 두 차례, 시민사회수석, 대통령 비서실장을 거쳤다.
참여정부 초기 이빨을 무려 10개나 뽑을 정도로 격무에 시달렸다. 업무시간 외에 직접 차를 몰고 비행기나 기차는 늘 일반석을 이용하는 등 관행화된 특혜를 철저히 내려놓았다. 과로에다 당의 총선 출마 요구를 거절한 데 대한 불편함이 커지자 민정수석을 1년도 못하고 물러났다. 휴식은 길지 않았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향했던 히말라야 트래킹에서 노 대통령 탄핵 소식에 중도 귀국해 변호인단을 꾸렸다. 탄핵심판 기각 후 시민사회수석으로 복귀했다가 민정수석으로 옮겼다. 2007년 비서실장을 맡으며 ‘동지 노무현’과 흥망성쇠를 같이 했다.
노 전 대통령이 퇴임 후 김해 봉하마을로 가면서 문 당선인도 인근 양산에 거처를 마련했다. 가끔 들르자고 다짐했지만, 이명박 정권은 그를 그냥 두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이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에게서 뇌물을 받은 의혹이 불거지자 변호인 겸 대변인으로 적극 방어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때 국민장의위원회 운영위원장으로 장례를 도맡았고, 이후 노무현재단을 설립해 이사장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그가 보여줬던 절제력과 의연함이 국민에 각인되면서 ‘정치인’으로 제2의 인생을 사는 계기가 됐다.
◇대권도전 재수 끝에 청와대 입성…‘적폐청산과 통합’ 숙제 = 노 전 대통령 서거 후인 2009년 경남 양산 국회의원 재보선과 이듬해 부산시장 후보로 거론됐지만 문 당선인은 여전히 현실정치와 선을 그었다. 그를 향한 정치참여 압박은 거셌다.
결국 정권교체라는 대의명분 속에서 야권 대통합 과정에 뛰어든 문 당선인은 2012년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에서 당선됐고, 그 두 달 뒤 대선후보로 나섰다.
안철수 후보와의 우여곡절 끝 단일화로 48.02%라는 역대 야권 대선후보 최고 득표율을 기록했지만, 박근혜 후보에게 무릎을 꿇었다. 인고와 침잠의 세월을 보내던 그였지만 이번엔 박근혜 정부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서해 북방한계선(NLL) 논란을 재연하고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불법 공개하면서 그를 옥죄어 왔다.
문 당선인은 2013년 10월 “검찰은 짜 맞추기 수사로 죄 없는 실무자들을 괴롭히지 말고 나를 소환하라”는 성명을 발표했고, 직접 검찰 조사를 받았다.
이듬해 발생한 세월호 참사에 대한 정권의 진상 은폐를 보며 그의 죄책감은 극에 달했다. 모든 게 2012년 대선 패배로 인한 참혹한 결과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실정을 보고도 새정치민주연합이 제 역할을 못 하자 혁신을 기치로 2014년 문 당선인은 당 대표 출마를 선언했다. 실패하면 정치적 사망선고는 불을 보듯 뻔했다.
독배가 될 수도 있었지만, 그는 당 대표에 선출돼 당내 쇄신을 주도했다. 그러나 친문 프레임을 뚫지 못하고 결국 안철수 후보가 탈당하는 분당 사태로 최대 위기에 봉착했다. 김종인 전 대표를 영입하며 작년 4·13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다.
대선을 차분히 준비하던 작년 하반기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이 드러나고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국회 탄핵소추안 가결과 헌법재판소의 해임 판결이 이어지면서 촛불민심과 함께했던 문 당선인이 적폐청산의 최적임자로 부상했다.
범보수 진영의 붕괴와 함께 안희정 충남지사·이재명 성남시장 등 역대 민주당 경선 사상 최고의 승부를 이겨내면서 대권이 그의 손에 다가온 듯했다.
하지만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로 이어가던 보수표심의 향배가 대선 막판 안철수 후보와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에게로 집결하면서 한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살얼음 국면이 계속됐다.
사상 첫 조기 대선을 가져다준 촛불민심을 토대로 한 손에는 적폐청산을, 다른 한 손에는 통합의 깃발을 부여잡고 ‘모든 국민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사자후를 토했고, 국민은 마침내 그의 손을 잡았다. 2008년 2월 25일 정권 2인자로 쓸쓸히 청와대 문을 나선 지 9년 2개월여 만에 1인자가 되어 그 문을 당당히 열어젖혔다.
연합뉴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만나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고 ‘정권 2인자’에 올랐지만, 정치와는 한사코 담을 쌓아왔던 그가 권력의 최정점에 오른 것은 역설에 가깝다.
학생운동 탓에 판사 임용이 좌절돼 변호사의 길로 들어선 것도, 홀로 계신 노모를 모시러 부산행을 택했다가 노 전 대통령을 만난 것도, 노 전 대통령의 서거로 정치에 입문하며 두 차례 대권에 도전한 것도 그에겐 운명이었다.
권력욕이 없었기에 순수하게 보였을 수 있었지만 ‘어정쩡한’ 모습이 오히려 그의 발목을 잡았다. 노 전 대통령 밑에서 민정수석과 비서실장을 지내면서 ‘폐족 친노’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진 채 ‘자의 반 타의 반’ 현실정치에 몸을 담갔지만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석패했다.
그가 ‘정치 신인’의 티를 벗으며 와신상담한 건 이때부터다. 친노(친노무현)에 이어 친문(친문재인) 패권주의라는 프레임이 끝없이 괴롭혔지만, 그는 오로지 국민만 바라봤다.
제1야당 대표를 거치며 분당(分黨) 사태로 무너지던 당을 재건해 작년 4·13 총선 승리를 이끌었다. 탄핵 정국 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 치열했던 경선에서 ‘적폐청산’과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을 내걸고 안희정 충남지사와 이재명 성남시장이라는 걸출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두 번째 본선에 뛰어들어 결국 대권을 거머쥐었다.
기쁨도 잠시, 그의 앞에 놓인 짐은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가볍지 않다. 국정농단 사태로 갈기갈기 찢긴 국민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 곤두박질치는 경제와 갈수록 팍팍해지는 국민의 삶,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계획) 문제로 미국과 중국 사이에 선 외교전, 북한의 도발로 인한 한반도 위기 그 무엇하나 간단치 않다.
앞으로 펼쳐질 여소야대 지형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면서 개혁 입법과 국민 통합을 동시에 완수해야 할 무거운 책무도 고스란히 그의 몫이다.
◇거제서 태어나 부산서 자란 가난한 소년 = 문 당선인은 1953년 1월 24일 경남 거제군 명진리 허름한 시골 농가에서 2남3녀 중 둘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함경도 흥남이 고향인 부모가 1950년 12월 흥남철수 때 잠시 중공군을 피한다는 심정으로 별 준비 없이 미군 함정에 몸을 실었던 게 실향의 한(恨)으로 이어졌다.
초등학교 입학 무렵 부산의 대표적인 달동네였던 영도로 이사했다. 성당에서 나눠주던 구호물자를 받으려 양동이를 들고 긴 줄을 서야 했던 가난은 여전했다. 모친의 연탄배달일을 돕다 리어카 채로 길가에 처박힌 일은 지금도 생생하다고 한다.
그는 자서전 운명에서 ‘돈이라는 게 별로 중요한 게 아니라는 지금의 내 가치관은 오히려 가난 때문에 내 속에 자리 잡은 것이다. 아마도 가난을 버티게 한 자존심이었을지 모르겠다. 그런 가치관은 살아오는 동안 큰 도움이 됐다’고 술회했다.
문 당선인은 지금도 자전거를 못 탄다. 어린 시절 자전거를 살 돈도, 배울 시간도 없었던 탓이다. 그래서 공부만 했고, 명문 경남중·고에 입학했다.
중학교 때 부유한 친구들을 보며 세상의 불공평을 느꼈다고 한다. 이 시절부터 독서에 빠졌다. 학교 도서관에 맨 마지막까지 남아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급기야 사상계 같은 사회비평 잡지로까지 영역을 넓혔다.
고교 시절 성적은 좋았지만 공부만 하는 모범생은 아니었다. 고3 때 술을 마시고 담배도 배웠다. 싸움에 말려들어 의리를 지키려다 정학을 당하기도 했다. 이름 탓에 ‘문제아’ 별명이 붙여졌지만 네 번의 정학을 받은 ‘문제학생’이었다.
◇민주화운동으로 두 번 구속…유치장에서 사시 합격 통보 = 역사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부모님과 선생님의 권유로 서울대 상대를 지원했다가 낙방해 재수 끝에 1972년 경희대 법대를 4년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그 시절이 그랬듯 대학생 문재인은 ‘반유신’ 운동권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대표적인 공안 조작 사건인 민청학련·인혁당 사건 당시인 1974년 문 당선인은 학내 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돼 구류처분을 받았다. 그게 시작이었다.
이듬해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의 사형을 계기로 대규모 시위를 이끌다 구속되고 학교에서 제적됐다. 그해 석방과 동시에 강제징집돼 특전사에서 군 생활을 했다. 당시 특전사 여단장이 전두환 전 대통령, 대대장이 장세동 전 안기부장이었다.
문 당선인은 폭파과정과 화생방 최우수 표창을 받을 정도로 특A급 사병이었다. 상병 때는 북한이 일으킨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대응작전에 투입되기도 했다.
1978년 제대 직후 부친을 잃은 회한으로 전남 해남 대흥사에서 고시공부에 매달려 1979년 사시 1차에 합격했다.
1980년 학교로 돌아온 문 당선인은 사시 2차를 치르고 경희대 복학생 대표로 ‘서울의 봄’ 한가운데에서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어 또다시 구속되고 만다.
그해 5월 서울역 앞 시위에서 발생한 경찰 사망사건 참고인으로 조사받느라 미결수로 경찰서 유치장 생활을 하던 중 사시 합격 소식을 들었다. 차석이었다.
당시 경찰서장은 축하차 면회를 온 학생처장과 법대 동창회장을 유치장 안으로 들여보내 조촐한 소주 파티를 허가했다. 경찰 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연수원 ‘차석’에도 판사 좌절…인권변호사 길서 노무현과 운명적 만남 = 사시 합격으로 난생처음 ‘평탄한 길’로 들어섰다. 7년 연애 끝에 부인 김정숙씨와 결혼해 1남1녀를 뒀다.
고 조영래 변호사·박원순 서울시장·박시환 대법관·송두환 헌법재판관·고승덕 변호사 등 쟁쟁한 동기들이 즐비했지만,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수료했다.
판사를 지망했지만 시위전력으로 좌절됐다. 대형로펌 스카우트를 거절하고 부산행을 택했다. 억울한 사람들을 대변하고 싶었기도 했지만, 부산에 홀로 계신 어머니를 모시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1982년 노 전 대통령과 운명적 만남의 시작이었다.
의기투합한 두 사람에게 각종 인권·시국·노동 사건이 몰렸다. 그는 ‘대한민국이 묻는다’ 저서에서 ‘인권변호사의 길을 간 이유는 변호사가 단순히 밥벌이 수단이 되어선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라고 적었다.
재야운동에 발을 들인 문 당선인은 부산·경남 민변을 창립하고, 부산변호사회 인권위원장·천주교 인권위원회 인권위원·부산 YMCA 이사와 노동자를 위한 연대 대표를 맡았다. 1985년 부산민주시민협의회를 창립하고 6월항쟁 때인 1987년 부산국본(부산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을 결성, 상임집행위원을 맡아 부산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다. 노 전 대통령이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았다.
1988년 노 전 대통령은 13대 총선에 출마해 정치권에 들어섰지만, 문 당선인은 노동문제 변호사 길을 이어갔다. 노 전 대통령이 당선된 2002년 대선 경선 때 문 당선인은 노 후보의 부산선대본부장을 맡으며 두 사람은 재결합했다.
노 전 대통령은 생전 문 당선인을 ‘친구’라고 불렀다. 2002년 대선 후보 당시 연설에서는 “사람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 친구를 보라고 했다. 제가 아주 존경하는 믿음직한 친구, 문재인을 친구로 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나는 대통령감이 된다. 나는 문재인을 친구로 두고 있다. 그는 성공했지만 군림하지 않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오늘도 돕고 있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오늘도 수고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참여정부 ‘왕수석’…盧곁 지킨 ‘친노적자’ = 문 당선인은 참여정부의 시작과 끝을 함께했다. 민정수석 두 차례, 시민사회수석, 대통령 비서실장을 거쳤다.
참여정부 초기 이빨을 무려 10개나 뽑을 정도로 격무에 시달렸다. 업무시간 외에 직접 차를 몰고 비행기나 기차는 늘 일반석을 이용하는 등 관행화된 특혜를 철저히 내려놓았다. 과로에다 당의 총선 출마 요구를 거절한 데 대한 불편함이 커지자 민정수석을 1년도 못하고 물러났다. 휴식은 길지 않았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향했던 히말라야 트래킹에서 노 대통령 탄핵 소식에 중도 귀국해 변호인단을 꾸렸다. 탄핵심판 기각 후 시민사회수석으로 복귀했다가 민정수석으로 옮겼다. 2007년 비서실장을 맡으며 ‘동지 노무현’과 흥망성쇠를 같이 했다.
노 전 대통령이 퇴임 후 김해 봉하마을로 가면서 문 당선인도 인근 양산에 거처를 마련했다. 가끔 들르자고 다짐했지만, 이명박 정권은 그를 그냥 두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이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에게서 뇌물을 받은 의혹이 불거지자 변호인 겸 대변인으로 적극 방어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때 국민장의위원회 운영위원장으로 장례를 도맡았고, 이후 노무현재단을 설립해 이사장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그가 보여줬던 절제력과 의연함이 국민에 각인되면서 ‘정치인’으로 제2의 인생을 사는 계기가 됐다.
◇대권도전 재수 끝에 청와대 입성…‘적폐청산과 통합’ 숙제 = 노 전 대통령 서거 후인 2009년 경남 양산 국회의원 재보선과 이듬해 부산시장 후보로 거론됐지만 문 당선인은 여전히 현실정치와 선을 그었다. 그를 향한 정치참여 압박은 거셌다.
결국 정권교체라는 대의명분 속에서 야권 대통합 과정에 뛰어든 문 당선인은 2012년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에서 당선됐고, 그 두 달 뒤 대선후보로 나섰다.
안철수 후보와의 우여곡절 끝 단일화로 48.02%라는 역대 야권 대선후보 최고 득표율을 기록했지만, 박근혜 후보에게 무릎을 꿇었다. 인고와 침잠의 세월을 보내던 그였지만 이번엔 박근혜 정부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서해 북방한계선(NLL) 논란을 재연하고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불법 공개하면서 그를 옥죄어 왔다.
문 당선인은 2013년 10월 “검찰은 짜 맞추기 수사로 죄 없는 실무자들을 괴롭히지 말고 나를 소환하라”는 성명을 발표했고, 직접 검찰 조사를 받았다.
이듬해 발생한 세월호 참사에 대한 정권의 진상 은폐를 보며 그의 죄책감은 극에 달했다. 모든 게 2012년 대선 패배로 인한 참혹한 결과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실정을 보고도 새정치민주연합이 제 역할을 못 하자 혁신을 기치로 2014년 문 당선인은 당 대표 출마를 선언했다. 실패하면 정치적 사망선고는 불을 보듯 뻔했다.
독배가 될 수도 있었지만, 그는 당 대표에 선출돼 당내 쇄신을 주도했다. 그러나 친문 프레임을 뚫지 못하고 결국 안철수 후보가 탈당하는 분당 사태로 최대 위기에 봉착했다. 김종인 전 대표를 영입하며 작년 4·13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다.
대선을 차분히 준비하던 작년 하반기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이 드러나고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국회 탄핵소추안 가결과 헌법재판소의 해임 판결이 이어지면서 촛불민심과 함께했던 문 당선인이 적폐청산의 최적임자로 부상했다.
범보수 진영의 붕괴와 함께 안희정 충남지사·이재명 성남시장 등 역대 민주당 경선 사상 최고의 승부를 이겨내면서 대권이 그의 손에 다가온 듯했다.
하지만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로 이어가던 보수표심의 향배가 대선 막판 안철수 후보와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에게로 집결하면서 한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살얼음 국면이 계속됐다.
사상 첫 조기 대선을 가져다준 촛불민심을 토대로 한 손에는 적폐청산을, 다른 한 손에는 통합의 깃발을 부여잡고 ‘모든 국민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사자후를 토했고, 국민은 마침내 그의 손을 잡았다. 2008년 2월 25일 정권 2인자로 쓸쓸히 청와대 문을 나선 지 9년 2개월여 만에 1인자가 되어 그 문을 당당히 열어젖혔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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