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 고문헌 현장 15] 신라시대, 경남의 고문헌
[경남의 고문헌 현장 15] 신라시대, 경남의 고문헌
  • 경남일보
  • 승인 2024.02.28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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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에 새겨진 역사의 순간
가야는 기원전 1세기에서 서기 6세기까지 경상남북도에 형성된 작은 나라들의 연합이었다.

562년 신라 진흥왕에 의해 멸망했다. 신라시대 기록은 쇠나 바위 등에 새긴 금석문이 전하는데, 이를 통해 신라시대 경남의 고문헌을 알아본다.



◇신라 진흥왕 척경비

경남지역 신라 고문헌은 창녕에 있는 신라 진흥왕 척경비(新羅 眞興王 拓境碑)가 가장 앞선다. 척경비를 방문하게 된 계기는 지난해 6월 초다. 창녕박물관에서 기증받은 유물 심의 회의에 참석하는 겨를에 잠시 틈을 내었다. 이날은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이었다. 우산을 받쳐 들고 척경비를 살펴보니 맨눈으로는 글자를 전혀 판독할 수가 없었다. 안내판 설명문에 따르면 척경비의 크기는 높이 162㎝, 너비 174㎝, 두께 30~51㎝다. 비문의 첫머리에 신사년(辛巳年) 2월 1일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진흥왕 22년(561)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고, 전체 643자 가운데 현재 400자 정도가 판독된 상태라고 한다. 척경비는 진흥왕이 561년 창녕 지방을 점령하고 국경을 넓힌 사실을 기록한 승전비로, 가야 입장에서 보면 뼈아픈 역사를 담고 있다. 진흥왕이 창녕을 점령한 다음해에 가야가 신라에 복속됐기 때문이다. 신라시대 기록은 희귀한 까닭에 국보 제33호로 지정됐다.

 
신라 진흥왕 척경비

 
신라 진흥왕 척경비 판독문
◇산청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척경비 다음으로 제작된 신라시대 금석문을 알아보기 위해 지리산 덕산사로 향했다.

덕산사는 657년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무염국사(無染國師, 801~888)가 상주하면서 번창하였는데, 1609년 원인 모를 화재로 전소됐다. 이후 수백 년 동안 폐사된 채 방치되어 절터는 논밭으로 이용됐다. 1959년 원경 스님이 불사를 일으켜 내원사로 중건했다. 절과 인연이 깊은 진주민예총 김태린 전 지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주지 스님과 만남을 부탁드렸다. 김태린 씨가 절에 먼저 도착하여 주지실로 안내해 주었다. 주지 동조(東照) 스님과 명함을 교환했는데, 명함 뒷면에는 ‘德山寺’가 새겨진 기와 사진이 들어 있다. 대웅전을 건립할 때 ‘덕산사’가 새겨진 기와를 발견해 2021년 절 이름을 ‘내원사’에서 ‘덕산사’로 개명했다고 한다. 점심 공양 시간에 절 경내를 잠시 둘러보았다. 절은 두 계곡에서 흘러오는 시냇물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었다. 물 밖은 속세인데, 속세의 소리를 세찬 물소리가 차단하고 있었다. 사방을 둘러보니 온통 산봉우리다. 절이 연꽃 속에 들어앉은 형국이었다.

대웅전 옆 비로전(毘盧殿)에 들어가 국보 233-1호로 지정된 석남암사지(石南巖寺址) 석조비로자나불좌상(石造毘盧遮那佛坐像)을 살펴보았다. 불상은 좌대 위에 앉아 있었고, 뒤에는 광배가 받치고 있었다. 불상, 광재, 좌대는 여러 조각을 조립해 놓은 것이었다. 불상은 날씬한 몸매에 숭고함이 느껴졌다. 김태린 씨는 불상 얼굴을 보면 청년의 모습이 보인다고 한다. 공양이 끝난 뒤 주지실에 다시 들어가 불상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렸다.

불상은 지리산 장단 계곡 속 해발 900m에 있었던 석남암사(石南巖寺) 터에서 발굴된 것이다. 석남은 진달래를 의미한다. 봄에 절터를 가 보면 진달래가 아름답게 피어 있다. 석남암사는 진달래가 예쁘게 피는 바위 속 아름다운 절이라는 의미이다.

불상은 신라 혜공왕 즉위 6년인 776년에 제작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지권인(智拳印)’ 비로자나불상으로, 경주 불국사가 창건되던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절은 오래전에 폐사되었는데, 1937년 석남리에 사는 한 주민이 약초 캐러 갔다가 이 불상을 발견했다. 마을 주민들은 이 불상에 가서 굿을 하고, 소원도 빌었는데 효험이 있었다고 한다. 소원을 빌러 가기에 거리가 너무 멀고 불편하여 1947년 무렵 마을 주민이 불상을 지게에 지고 마을로 옮겼다. 절터가 험준한 산이었기 때문에 무게를 덜기 위하여 불상의 뒷면을 깎아냈다. 불상을 지게에 지고 내려오다가 떨어뜨려 목이 부러졌다. 좌대(座臺)와 광배석(光背石)은 운반을 포기했다고 한다.

옮겨온 불상은 처음에는 마당에 모셨는데, 부처를 마당에 모시는 것이 적절치 못했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이 불상을 절에 모실 것을 권했다. 이에 1953년경 내원사에 불상을 모시게 되었다. 내원사에서는 1973년 당시 하루 임차비가 2000만 원이나 하는 독일제 헬기를 이용하여 광배와 좌대를 추가로 옮겨 왔다고 한다.

불상은 2016년 국보로 승격됐다. 불상이 국보로 승격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이 불상 속에 제작연대를 알 수 있는 작은 단지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이 단지는 부산시립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다.

 
동조스님으로 부터 설명을 듣는 필자
석조비로자나불 정면 모습
석조비로자나불 측면 모습
◇부산시립박물관 전시 납석사리호

국보 233-2호 납석사리호를 보기 위해 부산시립박물관으로 달려갔다. 부산시립박물관은 1978년에 개관하였다. 박물관을 들어서니 낯익은 석등이 보인다. 팻말을 보니 합천 영암사지 쌍사자 석등이었다. 경남의 대표적인 유물이 복제되어 부산에 전시되고 있다고 하니, 경남인으로서 자랑스러웠다.

전시실 유물은 선사시대부터 근대까지 부산의 역사를 망라하고 있었다. 사리호를 부지런히 찾았다. 사리호는 2층 ‘동래관(東萊館)’ 전시실 입구에 전시되어 있었다. 높이 14.5㎝, 몸통 지름 12.3㎝의 비교적 크기가 작은 단지였다.

사리호는 뚜껑이 있는 형태로, 전체적으로 잘 다듬어졌으며 흑갈색을 띠었다. 항아리의 아가리 끝이 일부 파손되고, 몸통에도 약간의 금이 있으나 거의 완전한 형태다. 바닥 부분은 굽이 없이 평편하고 넓어 안정감을 준다.

사리호 몸통에는 비로자나불상을 만든 경위가 한 줄에 8~11자씩 15줄로 136자가 적혀 있었다. 글자 크기가 일정하지 않고 불규칙하게 나열되어 있어 판독이 어려운 부분도 있으나 대체적인 내용 파악은 가능하다. 바닥에도 4행 23자의 이두문(吏讀文)이 남아 있으나 글씨체가 가지런하지 않고 긁힌 곳이 많아 판독이 어렵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영태(永泰) 2년(766) 7월 2일 신라의 승려 법승(法僧)과 법연(法緣)이 죽은 두온애랑(豆溫哀郞)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하고 무구정광대다라니(無垢淨光陀羅尼)를 함께 봉안하여 석남사 관음암에 안치하였는데, 이 공덕으로 두온애랑이 성불(成佛)하기를 빈다”는 것이다.

처음 이 항아리를 발견하였을 때에는 속에 청동으로 만든 작은 상자가 있었고, 그 안에 종이 뭉치가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 종이 뭉치는 맨손으로 잡아 들어 올린 직후 부서져 없어졌다고 하는데, 무구정광대다라니경으로 추정된다. 만약 출토 과정에서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더라면 국보급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추가로 소장하게 되었을 것이다. 불국사의 석가탑에서 발견된 다라니경은 751년에 제작된 것으로,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이기 때문이다.

사리호가 부산시립박물관에 소장하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마을 주민은 불상 속에 들어 있는 작은 단지를 진주 골동품 업자에게 4만5000원에 팔았다고 한다. 그 후 부산시립박물관 전문가는 글이 새겨져 있는 사리호의 가치를 알아보고, 1981년 135만 원에 구매하여 국보로 지정하였다고 한다. 사리호는 부산시립박물관이 소장한 유일한 국보인데, ‘동래관(東萊館)’ 전시와 성격이 맞지 않았고, 동래를 전시하는 부속물로 느껴졌다. 사리호를 위해 별도의 전시 공간을 마련하여 의미와 국보로서의 품격을 부여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납석사리호
덕산사 비로전 전경
◇납석사리호(蠟石舍利壺)

동조 스님과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험준한 지리산 골짜기에 저 불상을 조성하고 사리호를 봉안한 연유가 무엇일까요.”

“지리산은 신라시대 화랑의 훈련장이었어요. 두온애랑은 신라 화랑으로, 수천 명의 화랑을 이끄는 훈련대장이었던 것 같아요. 장래가 촉망되는 두온애랑이 젊은 나이로 훈령 도중 석남암사지 인근에서 사고로 죽은 것 같아요. 그래서 두온애랑의 공덕을 빌기 위해 절을 지은 것이 아닐까 추측합니다. 두온애랑의 부모는 당시 신라의 귀족으로, 부자였던가 봅니다. 험준한 산 중턱에 절을 창건한다는 것은 엄청난 공력과 비용이 들기 때문입니다. 사리호의 재질을 보면 경주 지역에서 생산되는 곱돌입니다. 경주에서 생산되는 고급 곱돌을 구하여 자식을 추모하는 글을 적어 불상 속에 안치한 것이지요. 이는 일반 서민의 부모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석남암사지 유물이 우여곡절을 거쳐 덕산사와 부산시립박물관에 분산 소장됐다. 부산시립박물관 소장 사리호의 기록이 있었기에 석남암사지의 역사와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의 조성 연대를 알 수 있게 되었고, 또 불상이 국보로 승격되는 결정적인 증거가 됐다.

덕산사 주지 동조 스님은 부산시립박물관의 협조를 얻어 사리호 2개를 복제해 1개를 덕산사 비로자나불과 함께 모실 계획이라고 한다. 비운의 역사를 간직한 석남암사지 발굴 두 유물이 기록을 통해 다시 석남암사 본래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신라시대 경남의 소중한 기록문화유산을 보면서 기록의 힘이 대단함을 다시금 느낀다.

이정희 경상국립대 고문헌도서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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