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월아산 자락 청곡사에 위치
“사람들의 정신적 요람·기상 상징”
“사람들의 정신적 요람·기상 상징”
진주시 금산면 갈전리 18번지에 고찰인 청곡사가 있다.
청곡사는 신라 현강왕 5년(879년)에 창건되어 내려오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수난을 당했지만, 광해군 7년(1615년)에 복원되어 현재까지 천년의 세월을 딛고 월아산 자락에 포근하게 안긴 명소의 큰 사찰로서 익히 잘 알려져, 주말이면 전국의 많은 불자 신도가 즐겨 찾는 고찰이다.
월아산은 그렇게 높지 않아 어수선한 마음이 생기면 간혹 산에 오르는데, 진주시민들도 많이 찾는다.
어느 날부터 다른 곳의 사찰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청곡사의 넓디넓은 주차장 옆면 나지막한 언덕에, 계단과 경계석단의 약 10평에 오석으로 세긴 어른 키 정도의 임진왜란의 의병장으로 활약한 김덕령 장군의 전적비가 설치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사찰을 찾는 수많은 외지 사람과 시민들은 김덕령 장군의 전적비를 눈여겨 보지 않는 것 같다.
여느 사찰 부지에 부도탑의 형식이겠지 했는데, 임진왜란의 의병장의 전적비가 사찰부지에 설치된 내력과 전적비 관리보존이 궁금했다. 청곡사에서 답을 얻지 못해 진주시청 문화예술과 강명주 팀장을 찾았다. 면담에서 “청곡사 주차장에 김덕령 장군의 전적비가 설치된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지방문화재 및 국보로 지정된 것이 아니므로 시·도가 관리하지 않는다”며 “광산김씨 후손들이 관리하는 것으로 안다”라는 답을 들었고 이에 수소문으로 진주시 내동면에 거주하는 장군의 후손인 김용달 씨를 찾아갔다.
김용달 씨는 의병장 김덕령 장군의 후손으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다. 약 20년 전에 월아산 청곡사 주차장 내 전적비가 설치되어 있는 것은 알지만 그 과정은 알지 못한다. 내년 초경에 장군의 전적비를 문중에서 정비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월아산 입구에 청곡사를 창건한 안내 글을 인용하면 “일찍이 진양지에 이르기를, 동쪽에는 비봉의 형국이 있고 서쪽에는 천마의 형국이 있어, 예로부터 산 동쪽에는 장수가 날 것이라 하였다. 산기슭에는 천년 고찰인 청곡사가 있고, 산 중턱에는 임진왜란 때 충용장군 김덕령이 왜적을 막기 위해 쌓은 목책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월아산은 진주성과 더불어 진주 사람들의 정신적 요람이자 기상의 상징으로서 국란 기에는 우국충정의 국가관을 갖게 하고 단결케 하는 정신적 버팀목의 역할을 해왔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청곡사로부터 김덕령 장군의 전적비 설치 조성에 대하여 더 자세하게 들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 이유는 청곡사 입구 설명에서 “왜적을 막기 위해 쌓은 목책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진주성과 더불어 진주 사람들의 정신적 요람이자 기상의 상징으로서 국란 기에는 우국충정의 국가관을 갖게 하고 단결케 하는 정신적 버팀목의 역할을 해왔다”라고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재 청곡사 주차장 내 설치된 김덕령 장군의 전적비의 세긴 글들은 한학에 능통하지 않으면 해석이 간단하지 않은 문장들이다. 약 20년의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전국에서 청곡사를 찾아온 방문객들과 일반시민들이 보기에는 검은 대리석에 수체화로 보였을 것이기에 서글퍼진다.
조속한 시일에, 장군의 업적이 비바람에 씻기지 않고 오랜 세월에 견뎌낼 녹슬지 않을 구조물에 새겨, 후손들이 “국란기에는 우국충정의 국가관을 갖게 하고 단결케 하는 정신적 버팀목의 역할”을 할 교육의 훈육으로 서사설이 지금의 우리에게 다가오기를 절실한 바람이다.
지난 18일 청곡사를 찾은 그날 비에 흠뻑 젖은 장군의 전적비가 오늘따라 왠지 쓸쓸하게 보여 눈길을 피하고 싶다.
박장웅 시민기자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청곡사는 신라 현강왕 5년(879년)에 창건되어 내려오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수난을 당했지만, 광해군 7년(1615년)에 복원되어 현재까지 천년의 세월을 딛고 월아산 자락에 포근하게 안긴 명소의 큰 사찰로서 익히 잘 알려져, 주말이면 전국의 많은 불자 신도가 즐겨 찾는 고찰이다.
월아산은 그렇게 높지 않아 어수선한 마음이 생기면 간혹 산에 오르는데, 진주시민들도 많이 찾는다.
어느 날부터 다른 곳의 사찰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청곡사의 넓디넓은 주차장 옆면 나지막한 언덕에, 계단과 경계석단의 약 10평에 오석으로 세긴 어른 키 정도의 임진왜란의 의병장으로 활약한 김덕령 장군의 전적비가 설치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사찰을 찾는 수많은 외지 사람과 시민들은 김덕령 장군의 전적비를 눈여겨 보지 않는 것 같다.
여느 사찰 부지에 부도탑의 형식이겠지 했는데, 임진왜란의 의병장의 전적비가 사찰부지에 설치된 내력과 전적비 관리보존이 궁금했다. 청곡사에서 답을 얻지 못해 진주시청 문화예술과 강명주 팀장을 찾았다. 면담에서 “청곡사 주차장에 김덕령 장군의 전적비가 설치된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지방문화재 및 국보로 지정된 것이 아니므로 시·도가 관리하지 않는다”며 “광산김씨 후손들이 관리하는 것으로 안다”라는 답을 들었고 이에 수소문으로 진주시 내동면에 거주하는 장군의 후손인 김용달 씨를 찾아갔다.
김용달 씨는 의병장 김덕령 장군의 후손으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다. 약 20년 전에 월아산 청곡사 주차장 내 전적비가 설치되어 있는 것은 알지만 그 과정은 알지 못한다. 내년 초경에 장군의 전적비를 문중에서 정비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월아산 입구에 청곡사를 창건한 안내 글을 인용하면 “일찍이 진양지에 이르기를, 동쪽에는 비봉의 형국이 있고 서쪽에는 천마의 형국이 있어, 예로부터 산 동쪽에는 장수가 날 것이라 하였다. 산기슭에는 천년 고찰인 청곡사가 있고, 산 중턱에는 임진왜란 때 충용장군 김덕령이 왜적을 막기 위해 쌓은 목책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월아산은 진주성과 더불어 진주 사람들의 정신적 요람이자 기상의 상징으로서 국란 기에는 우국충정의 국가관을 갖게 하고 단결케 하는 정신적 버팀목의 역할을 해왔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청곡사로부터 김덕령 장군의 전적비 설치 조성에 대하여 더 자세하게 들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 이유는 청곡사 입구 설명에서 “왜적을 막기 위해 쌓은 목책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진주성과 더불어 진주 사람들의 정신적 요람이자 기상의 상징으로서 국란 기에는 우국충정의 국가관을 갖게 하고 단결케 하는 정신적 버팀목의 역할을 해왔다”라고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재 청곡사 주차장 내 설치된 김덕령 장군의 전적비의 세긴 글들은 한학에 능통하지 않으면 해석이 간단하지 않은 문장들이다. 약 20년의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전국에서 청곡사를 찾아온 방문객들과 일반시민들이 보기에는 검은 대리석에 수체화로 보였을 것이기에 서글퍼진다.
조속한 시일에, 장군의 업적이 비바람에 씻기지 않고 오랜 세월에 견뎌낼 녹슬지 않을 구조물에 새겨, 후손들이 “국란기에는 우국충정의 국가관을 갖게 하고 단결케 하는 정신적 버팀목의 역할”을 할 교육의 훈육으로 서사설이 지금의 우리에게 다가오기를 절실한 바람이다.
지난 18일 청곡사를 찾은 그날 비에 흠뻑 젖은 장군의 전적비가 오늘따라 왠지 쓸쓸하게 보여 눈길을 피하고 싶다.
박장웅 시민기자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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