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진주 북평양' 소문난 풍류, 대중예술로 맥 이어
조선시대 교방에서 이어져 온 예술의 끼
한국 대중가요 처음으로 만든 진주 사람
강남달, 목포의 눈물, 번지없는 주막 등
한국을 뒤흔든 대중 예술인 대거 배출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춤과 노래, 즉 가무를 즐기는데 진주 사람들이 빠질 수는 없다. 국가 중요 무형문화재인 진주검무를 비롯해 무려 6개의 전통 춤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춤과 노래를 즐겼다. 진주 사람들의 그런 끼와 재능은 오늘날 대한민국 대중문화의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송희복 진주교대 명예교수는 “진주의 독특한 지역 정서와 예술적 재능이 교방 문화에서부터 대중가요를 비롯한 한국 대중문화 전반에까지 영향을 끼쳤다”라고 말했다.
◇진주 기생들이 만들어 낸 교방 문화
진주는 그 독특한 풍류가 가히 북쪽의 평양과 견줄만하다고 해서 ‘남진주 북평양’으로 불리기도 했다.
경남일보의 초대 주필을 지낸 장지연 선생은 1910년 1월 7일 자 신문에 진주의 풍류와 문화를 소개하면서 풍족한 물자와 우거진 대나무, 아름다운 기녀를 ‘진양 삼절’이라고 표현했다.
기녀, 즉 기생은 진주만의 멋과 맛인 ‘교방 문화’를 만들어 냈다. 교방은 기생을 양성하는 일종의 국립기관이다.
조선에서 교방이 설치된 곳은 전국 주요 도시 30여 곳에 지나지 않는다. 이곳에서 배출된 진주의 기생들은 오늘날의 국립 예술인에게 해당하는 뛰어난 기예를 가졌다. 그들이 궁중 연회에서 춘 진주검무는 국가 중요 무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될 만큼 그 수준이 매우 높다.
진주 기생은 ‘의로운 기생’, 논개의 후예라는 자부심이 무척 강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진주에서 전국 최초로 기생 독립 만세운동을 일으키는 등 독자적인 항일 투쟁을 주도했다.
일제강점기 35년을 거치면서 조선 기생은 맥이 끊겼다. 일부 사람들이 ‘기생’이란 단어를 함부로 갖다 붙이면서 한때 부정적 인식도 생겨났지만, 지금은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본래의 모습을 되찾고 있다.
진주 교방 문화는 한국 전통 가무와 음식, 복식을 계승하는 중요한 축으로 평가받고 있다. 기생들이 남긴 전통 춤과 노래, 비빔밥과 냉면 등의 교방 음식은 오늘날 진주 곳곳에 남아 진주의 맛과 멋을 대표하는 문화 아이콘으로 떠오르고 있다.
황경규 진주향당 상임고문은 “진주의 기생은 한국 전통 가무의 보존과 전승자이자 뛰어난 예술인이었다. 교방 문화가 진주의 새로운 문화 콘텐츠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각계의 노력이 계속 이어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가요 만든 진주 사람
진주 사람들의 예술적 재능은 우리나라 대중가요사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시초는 1927년에 서울 단성사에서 개봉한 무성영화 ‘낙화유수’의 주제곡인 ‘강남달’이라는 노래다. 진주 출신의 김서정(본명 김영환)이 만든 노래다.
영화는 진주가 배경으로 젊은 화가와 기생의 사랑 이야기를 다뤘다. 영화 속 노래 ‘강남달’은 우리나라 첫 영화 주제곡으로, 촉석루에 앉아서 강남 위에 뜬 달과 남강을 바라보며 지었다고 알려졌다.
김서정과 함께 진주 출신으로 한국 대중가요계에 큰 발자취를 남긴 사람은 너무 많다. 제목만 들어도 알만한 대중가요 상당수가 진주 출신의 가수가 불렀고, 작사와 작곡을 했다.
당대 가요계에 한 획을 그은 거장으로는 ‘애수의 소야곡’, ‘이별의 부산정거장’, ‘무너진 사랑탑’ 등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히트곡을 부른 남인수가 있다. 그의 동상과 노래비가 진양호에 세워졌지만, 친일 논란에 최근 수년 간 그의 이름을 딴 가요제 개최에 대한 찬반 논란이 뜨겁다.
천재 작곡가로 ‘한국가요의 슈베르트’라고 평가받는 이재호도 진주 출신이다. 그는 ‘번지없는 주막’, ‘나그네 설움’, ‘불효자는 웁니다’, ‘단장의 미아리 고개’ 등 무려 2000여 편의 가요를 작곡했다. 1996년 한국 대중가요 발전에 공헌한 업적을 기려 문화훈장이 추서됐는데, 고향인 진주 진양호 전망대 올라가는 길에 그의 노래비가 건립돼 있다.
‘밤안개’를 작곡한 진주고보 출신의 이봉조, ‘대머리 총각’ 등을 작곡한 정민섭, 가수 이미자의 대표곡인 ‘목포의 눈물’ 등을 작곡한 손목인도 진주 출신이다.
그들이 만든 노래에는 일제강점기, 6·25전쟁, 경제개발의 과정, 그 가난과 시련의 시기 속에서 살아온 우리네 사람들의 삶과 애환이 담겨 있다. 지상파에서 해마다 이들 진주 출신 가요인들의 무대를 정기적으로 방송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지금도 종편에서 방영되는 트로트 경연 프로그램에 진주 출신이 빠지지 않는 것도 바로 이러한 진주사람에게 전해져 오는 남다른 예술적 재능과 끼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진주의 문화예술, 재도약을 바라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K-pop 열풍, 1920년대부터 시작된 대중가요계에서 활동한 진주 출신의 면면을 보면 오늘날 대한민국 대중가요 중심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단 대중가요계뿐만 아니다. 클래식계에서 ‘한국의 차이코프스키’로 불리는 이상근 작곡가가 진주 출신으로 진주시는 매년 ‘이상근 국제음악제’를 개최한다. 화단에서도 진주 출신 화가들의 활약이 이어졌다. 1950년대 프랑스로 이주해 60여년 간 작품활동을 펼친 화가 이성자, 한국적 색채를 찾아 오방색을 사용한 독창적인 작품으로 한국 화단에 돌풍을 일으킨 박생광, 서예가 은초 정명수 등도 여러 방면에서 명성을 떨쳤다. ‘발바리 시리즈’로 유명한 만화가 강철수, ‘둘리 아빠’로 불리는 만화가 김수정도 진주 출신이다.
문화 예술계를 이끌어 온 진주 예인들의 활동이 있었기에 진주에 국립박물관과 경남문화예술회관이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의 진주는 청년들이 떠나고 있다. 경상국립대를 비롯한 지역 대학가에 노래하는 진주의 청년들을 찾기 어렵고 따로 문화예술을 배울 공간도 마땅치 않아 보인다.
한때 전국을 뒤흔든 예술인들을 배출한 진주이지만 그 뒤를 이을 출중한 후배들의 모습이 아직 보이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진주의 오늘날 숙제는 지역의 청년들이 진주에 정착해서 제2의 이재호, 이봉조, 이성자를 꿈꿀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떠나간 청년들도 진주에 다시 돌아와 노래하고 교방 문화를 꽃피우고, 대한민국 문화예술을 더욱 빛내는 그날이 다시 오기를, 그래서 더 많은 기념비가 진주지역 곳곳에 세워지기를 기대해 본다.
글=임명진기자·사진=김지원기자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진주의 기생, 산홍
진주 기생은 높은 학식과 고고함으로 유명했다. 기생 ‘산홍’은 그 미모가 아름답고 서예를 잘했다. 을사오적의 하나인 이지용이 진주를 찾았다가 산홍을 보고 반해 첩으로 삼으려 했지만, ‘역적의 첩이 될 수 없다’며 단칼에 거절하고 오히려 크게 꾸짖었다. 진주성 안 논개 사당인 의기사에는 산홍이 남긴 시가 있다.
논개는 왜장을 안고 몸을 날려 의로운 이름을 남겼지만, 자신은 피리와 북소리 따라 아무렇게나 놀고 있음을 부끄러워 하는 내용이다.
‘역사에 길이 남을 진주의 의로움
두 개의 사당과 높은 누각으로 서 있네
별일 없이 살아가는 게 부끄러워
피리와 북소리 따라 아무렇게 놀고 있네’
■경남문화예술회관
진주에 있는 경남문화예술회관은 국립진주박물관과 함께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진주 사람들에게는 자부심의 공간이다. 경남도가 문화 발전을 위해 종합 문화예술의 전당으로 도청 소재지인 창원이 아닌 1988년 진주에 건립했다. 다양한 문화 공연과 전시 공간으로 혁신도시 이전 공공기관 임직원과 가족들도 즐겨 찾는 곳이다.
한국 대중가요 처음으로 만든 진주 사람
강남달, 목포의 눈물, 번지없는 주막 등
한국을 뒤흔든 대중 예술인 대거 배출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춤과 노래, 즉 가무를 즐기는데 진주 사람들이 빠질 수는 없다. 국가 중요 무형문화재인 진주검무를 비롯해 무려 6개의 전통 춤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춤과 노래를 즐겼다. 진주 사람들의 그런 끼와 재능은 오늘날 대한민국 대중문화의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송희복 진주교대 명예교수는 “진주의 독특한 지역 정서와 예술적 재능이 교방 문화에서부터 대중가요를 비롯한 한국 대중문화 전반에까지 영향을 끼쳤다”라고 말했다.
◇진주 기생들이 만들어 낸 교방 문화
진주는 그 독특한 풍류가 가히 북쪽의 평양과 견줄만하다고 해서 ‘남진주 북평양’으로 불리기도 했다.
경남일보의 초대 주필을 지낸 장지연 선생은 1910년 1월 7일 자 신문에 진주의 풍류와 문화를 소개하면서 풍족한 물자와 우거진 대나무, 아름다운 기녀를 ‘진양 삼절’이라고 표현했다.
기녀, 즉 기생은 진주만의 멋과 맛인 ‘교방 문화’를 만들어 냈다. 교방은 기생을 양성하는 일종의 국립기관이다.
조선에서 교방이 설치된 곳은 전국 주요 도시 30여 곳에 지나지 않는다. 이곳에서 배출된 진주의 기생들은 오늘날의 국립 예술인에게 해당하는 뛰어난 기예를 가졌다. 그들이 궁중 연회에서 춘 진주검무는 국가 중요 무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될 만큼 그 수준이 매우 높다.
진주 기생은 ‘의로운 기생’, 논개의 후예라는 자부심이 무척 강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진주에서 전국 최초로 기생 독립 만세운동을 일으키는 등 독자적인 항일 투쟁을 주도했다.
일제강점기 35년을 거치면서 조선 기생은 맥이 끊겼다. 일부 사람들이 ‘기생’이란 단어를 함부로 갖다 붙이면서 한때 부정적 인식도 생겨났지만, 지금은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본래의 모습을 되찾고 있다.
진주 교방 문화는 한국 전통 가무와 음식, 복식을 계승하는 중요한 축으로 평가받고 있다. 기생들이 남긴 전통 춤과 노래, 비빔밥과 냉면 등의 교방 음식은 오늘날 진주 곳곳에 남아 진주의 맛과 멋을 대표하는 문화 아이콘으로 떠오르고 있다.
황경규 진주향당 상임고문은 “진주의 기생은 한국 전통 가무의 보존과 전승자이자 뛰어난 예술인이었다. 교방 문화가 진주의 새로운 문화 콘텐츠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각계의 노력이 계속 이어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가요 만든 진주 사람
진주 사람들의 예술적 재능은 우리나라 대중가요사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시초는 1927년에 서울 단성사에서 개봉한 무성영화 ‘낙화유수’의 주제곡인 ‘강남달’이라는 노래다. 진주 출신의 김서정(본명 김영환)이 만든 노래다.
영화는 진주가 배경으로 젊은 화가와 기생의 사랑 이야기를 다뤘다. 영화 속 노래 ‘강남달’은 우리나라 첫 영화 주제곡으로, 촉석루에 앉아서 강남 위에 뜬 달과 남강을 바라보며 지었다고 알려졌다.
김서정과 함께 진주 출신으로 한국 대중가요계에 큰 발자취를 남긴 사람은 너무 많다. 제목만 들어도 알만한 대중가요 상당수가 진주 출신의 가수가 불렀고, 작사와 작곡을 했다.
당대 가요계에 한 획을 그은 거장으로는 ‘애수의 소야곡’, ‘이별의 부산정거장’, ‘무너진 사랑탑’ 등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히트곡을 부른 남인수가 있다. 그의 동상과 노래비가 진양호에 세워졌지만, 친일 논란에 최근 수년 간 그의 이름을 딴 가요제 개최에 대한 찬반 논란이 뜨겁다.
천재 작곡가로 ‘한국가요의 슈베르트’라고 평가받는 이재호도 진주 출신이다. 그는 ‘번지없는 주막’, ‘나그네 설움’, ‘불효자는 웁니다’, ‘단장의 미아리 고개’ 등 무려 2000여 편의 가요를 작곡했다. 1996년 한국 대중가요 발전에 공헌한 업적을 기려 문화훈장이 추서됐는데, 고향인 진주 진양호 전망대 올라가는 길에 그의 노래비가 건립돼 있다.
‘밤안개’를 작곡한 진주고보 출신의 이봉조, ‘대머리 총각’ 등을 작곡한 정민섭, 가수 이미자의 대표곡인 ‘목포의 눈물’ 등을 작곡한 손목인도 진주 출신이다.
그들이 만든 노래에는 일제강점기, 6·25전쟁, 경제개발의 과정, 그 가난과 시련의 시기 속에서 살아온 우리네 사람들의 삶과 애환이 담겨 있다. 지상파에서 해마다 이들 진주 출신 가요인들의 무대를 정기적으로 방송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지금도 종편에서 방영되는 트로트 경연 프로그램에 진주 출신이 빠지지 않는 것도 바로 이러한 진주사람에게 전해져 오는 남다른 예술적 재능과 끼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K-pop 열풍, 1920년대부터 시작된 대중가요계에서 활동한 진주 출신의 면면을 보면 오늘날 대한민국 대중가요 중심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단 대중가요계뿐만 아니다. 클래식계에서 ‘한국의 차이코프스키’로 불리는 이상근 작곡가가 진주 출신으로 진주시는 매년 ‘이상근 국제음악제’를 개최한다. 화단에서도 진주 출신 화가들의 활약이 이어졌다. 1950년대 프랑스로 이주해 60여년 간 작품활동을 펼친 화가 이성자, 한국적 색채를 찾아 오방색을 사용한 독창적인 작품으로 한국 화단에 돌풍을 일으킨 박생광, 서예가 은초 정명수 등도 여러 방면에서 명성을 떨쳤다. ‘발바리 시리즈’로 유명한 만화가 강철수, ‘둘리 아빠’로 불리는 만화가 김수정도 진주 출신이다.
문화 예술계를 이끌어 온 진주 예인들의 활동이 있었기에 진주에 국립박물관과 경남문화예술회관이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의 진주는 청년들이 떠나고 있다. 경상국립대를 비롯한 지역 대학가에 노래하는 진주의 청년들을 찾기 어렵고 따로 문화예술을 배울 공간도 마땅치 않아 보인다.
한때 전국을 뒤흔든 예술인들을 배출한 진주이지만 그 뒤를 이을 출중한 후배들의 모습이 아직 보이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진주의 오늘날 숙제는 지역의 청년들이 진주에 정착해서 제2의 이재호, 이봉조, 이성자를 꿈꿀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떠나간 청년들도 진주에 다시 돌아와 노래하고 교방 문화를 꽃피우고, 대한민국 문화예술을 더욱 빛내는 그날이 다시 오기를, 그래서 더 많은 기념비가 진주지역 곳곳에 세워지기를 기대해 본다.
글=임명진기자·사진=김지원기자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진주의 기생, 산홍
진주 기생은 높은 학식과 고고함으로 유명했다. 기생 ‘산홍’은 그 미모가 아름답고 서예를 잘했다. 을사오적의 하나인 이지용이 진주를 찾았다가 산홍을 보고 반해 첩으로 삼으려 했지만, ‘역적의 첩이 될 수 없다’며 단칼에 거절하고 오히려 크게 꾸짖었다. 진주성 안 논개 사당인 의기사에는 산홍이 남긴 시가 있다.
논개는 왜장을 안고 몸을 날려 의로운 이름을 남겼지만, 자신은 피리와 북소리 따라 아무렇게나 놀고 있음을 부끄러워 하는 내용이다.
‘역사에 길이 남을 진주의 의로움
두 개의 사당과 높은 누각으로 서 있네
별일 없이 살아가는 게 부끄러워
피리와 북소리 따라 아무렇게 놀고 있네’
■경남문화예술회관
진주에 있는 경남문화예술회관은 국립진주박물관과 함께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진주 사람들에게는 자부심의 공간이다. 경남도가 문화 발전을 위해 종합 문화예술의 전당으로 도청 소재지인 창원이 아닌 1988년 진주에 건립했다. 다양한 문화 공연과 전시 공간으로 혁신도시 이전 공공기관 임직원과 가족들도 즐겨 찾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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