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남의 포엠산책(106)숫눈 -이재무
밤새 송이눈 내렸습니다
하나님, 공부에 지친 아이들에게
맘껏 낙서하며 뛰놀라고
도화지 한 장 크게 펼쳐놓았습니다
그런 날 마을은 가벼운 흥분이 돌고
들썩들썩 뚜껑 열고 나가고 싶어
안달하는 간장 된장 고추장
들어앉혀 어르고 달래느라
불룩 나온 배 더욱 불룩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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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본 처음을 기억하고 있어요. 아주 어렸을 때였는데 깊은 새벽이었죠. 방문으로 형언할 수 없는 빛이 들어오는 거예요. 빛에 이끌려 문을 열었죠. 한꺼번에 들이닥치는 환함에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세상이 대책 없이 반짝이고 있었죠. 그렇게 생애 처음으로 눈을 본 거예요. 수돗물이 얼었다며 엄마는 마당에 쌓인 눈을 가마솥으로 퍼다 옮겼고요. 아궁이에선 타닥타닥 장작이 타고 있었죠. 참으로 설레고 예쁜 날이었어요. 그날부터 이상한 환상이 가슴에서 자랐어요. 겨울엔 늘 크리스마스카드를 만들었어요. 붓에 듬뿍 하얀 물감을 묻혀 촘촘한 철망 조각을 대고 붓을 그으면 도화지 위에 하얗게 눈이 흩날렸죠. 그때의 환상이 무한한 긍정을 심어준 것 같아요. 세상 살면서 힘들고 지친 날이 왜 없었겠어요. 그럼에도 나를 저버리지 않았던 건 그날 숫눈이 준 세상이 있어서인 것 같아요. 우리는 누구나 이런 기억 하나쯤 간직하고 있을 거예요. 겨울방학 숙제로 그렸던 수채화 같은 시를 읽으면서 그 시간으로 돌아가 봅니다. 마당 켠에 빙그레 웃는 눈사람이 있겠지요. 하얗게 들썩이는 항아리들의 안달하는 모습도 보여요. 언제까지 사랑할 엄마도 아궁이에서 타닥이던 장작불도 온기가 되어 집안을 덥히고 있을 거예요.
통영문학상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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