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칼럼]44년 만에 국가 성폭력의 실체를 밝힌 광주 증언자들에게 지지를
[여성칼럼]44년 만에 국가 성폭력의 실체를 밝힌 광주 증언자들에게 지지를
  • 경남일보
  • 승인 2024.05.22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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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옥희 진주여성회 대표
전옥희 진주여성회 대표

 

지난 5월 18일 광주 망월동에 가서 민주화운동으로 희생된 분들과 민족민주열사들의 묘지를 찾아 참배하고, 참담했던 광주를 다시 떠올려 보았다. 무자비하게 권력을 잡은 이들이 민주화를 열망했던 시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누며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오랜 기간 입을 틀어막았다. ‘화려한 휴가’라는 작전명으로 광주시민들을 학살했지만 진상을 규명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고,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옛 전남도청 앞 전일빌딩에는 헬기에서 사격한 총탄들이 또렷히 남아있지만 그 발포를 명령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한다. 국가가 주도한 폭력의 피해를 당하고 그 가해자들이 권력의 중심이 되었던 수년동안 아무말도 못하고 억울하게 살아왔던 사람들에 대한 진상조사가 그나마 이루어지고, 피해자들의 명예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

지난해,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1980년 5월 18일부터 이듬해 1월까지 이어진 시위·연행·구금·조사 등 과정에서 일부 계엄군이 자행한 강제추행, 강간, 성고문 등 피해 주장 사건 52건 중 피해자가 사망하거나 조사를 거부하는 건 외에 19건을 조사했고 그 중 16건에 대해 ‘진상규명’ 결정을 내렸다. 조사를 위한 법적 권한을 가진 국가기관이 과거사 성폭력 사건의 종합적인 피해 실상을 규명한 것은 처음이다. 성차별과 가부장제가 공고한 한국 사회에서 성폭력 피해사실을 말하기는 쉽지 않으며, 국가폭력 중에서도 성폭력은 늘 뒷전이었다. 피해자들의 용기와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44년 만에야 밝혀진 것이다.

가해자는 자신의 방어책으로 언제나 은폐와 망각을 조장한다. 특히 가해자가 국가인 경우, 거대한 힘 앞에서 피해자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용기 내어 침묵을 깨고 나온 사람들도 늘 조금씩 생겨났다. 그 사람들 속에는 언제나 여성이 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도 많은 여성들이 영문도 모른채 성폭력을 당했지만 말할 수 없었고, 엄청난 국가폭력 앞에서 성폭력의 문제를 들어줄 사람도 없었다.

5·18성폭력은 피해자들에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압도적인 공포’를 안긴 폭력으로, 경험은 파편화되어 감각 기억만이 남기도 했지만, 사실과 증거를 비교하고, 16명이 넘는 피해자의 증언이 중첩돼 국가 성폭력의 패턴을 발견해냈다. 5·18 성폭력 피해는 계엄군이 5월 18일 금남로 일대에 최초 투입된 시점부터 여성에 대한 강제 탈의, 도심에서 2~3명의 군인이 여성을 강간하거나 추행했고, 당시에 망을 봐주는 군인이 있었다. 연행과 구금 과정에서 백운동 야산, 운천저수지 인근 등으로 이동해 강간하기도 했다. 피해자들은 극도의 공포 속에서 피해를 입었으며, 수사실에서 성고문 뿐 만아니라 구금시설에서도 수시로 성적 모욕과 기합을 경험했다. 계엄군들은 군복 안에 개인 신분을 숨겼기에 특정하기 어렵다. 피해자들이 가해자의 얼굴을 볼 수 없었고, 본다해도 식별할 수 없었다는 것이 일반 성범죄와 다르다.

피해자들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고통과 심각한 후유증을 안고 각자 살아가고 있다. 그녀들은 미투 운동을 계기로 용기를 얻기도 했고, 용기를 낸 피해자들은 어렵게 한 자리에 만나 서로의 증언자가 되어 힘을 주고 받았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차별과 성폭력에 관대한 문화는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다. 오랜 기간 축적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국가폭력에 성폭력이 동반된다는 것은 성적인 대상물로 여겨지는 여성의 위치를 다시 확인하게 한다. 국가는 일부 나쁜 남성들의 탓이라고 선을 그을 것이 아니라 이제라도 진상을 규명해 책임을 다하고, 피해자의 치유와 명예 회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5·18성폭력 피해자들의 증언을 마주하고, 국가 성폭력이 반복되지 않도록 인식하고, 교훈 삼아야 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성평등이 일상이 되도록 부단히 노력해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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