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190일 남았다. 선거전에 뛰어든 후보들은 자신을 알릴 수 있는 기간인 동시에 유권자는 누구를 뽑을 지 숙고할 수 있는 시간 190일. 출전 선수들에게야 굉장히 짧게 느껴질테지만 관중 입장에서는 충분히 충분하다.
그러고보니 요새 출판기념회가 봇물이다. 벌써 뜨겁다. 10명이 넘는 잠재적 후보들이 저마다 경남교육을 더 나은 방향으로 책임지겠다고들 호언하니 지켜보는 관객 입장에서야 이보다 더 흐뭇할 수 있을쏘냐. 우리는 그저 이들 중에서 더 나은, 혹은 더 괜찮은 후보만 잘 고르면 된다. 그런데 선거란 놈이 참으로 요상하단 말이지.
선거가 막판을 향해 줄달음하면 그동안 스멀거리던 ‘차악 선택론자’들의 목소리가 득세하기 시작한다. 이들 논리는 한결같다. “뭐, 완벽한 후보는 있을 수 없잖아. 덜 나쁘기만 해도 땡큐지.” 그렇다. 우리는 지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이 개똥같은 프레임에 너무나도 완벽하게 갖힌 고약한 경험이 있다.
후보가 완벽할 수는 없다. 동화 속 현자와 교육학 연구소의 인공지능을 합친 ‘슈퍼 교육감’이 나타날 일은 없잖은가. 하지만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와 ‘덜 나쁘면 된다’는 엄연히 다른 말이다. 앞쪽은 현실 감각이지만 뒷쪽은 그냥 포기 선언이다.
물론 차악 선택을 반복하는 이유는 있다. 후보 난립, 정보 부족, 정책 실종, 감정적 프레임, 중상모략, 마타도어 등등. 이것들이 선거를 ‘흑화’시킨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큰 문제는 우리 스스로가 ‘선거는 원래 이런 것’이라는 무기력에 익숙해진다는 점이다. 마치 오래된 교실 책걸상이 삐꺽거려도 ‘원래 이런 것’이라며 그냥 앉아 있는 것처럼 말이다. 더 웃긴 건 ‘차악’이라는 말이 마치 성숙한 판단처럼 포장된다는 사실이다. “나는 감정적이지 않아. 나는 현실적이야.” 하지만 이건 현실적이 아니라 현실에 굴복한 것에 가깝다. 차악 선택은 지혜가 아니라 체념이다. ‘어차피 완벽한 후보는 없어’라는 신념에 충실한 아주 순도 높은 패배주의다.
교육감 선거란 결국 이렇게 묻는 질문이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어른을 보여줄 것인가?” 그리고 그 질문에 “응. 덜 나쁜 어른!”이라고 답한다면 문제는 후보들이 아니라 우리 쪽에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에게는 후보의 정책, 실행 능력, 교육 철학, 구체적 계획들을 꼼꼼히 따져 볼 190일이 아직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