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저편 <79>
오늘의 저편 <79>
  • 경남일보
  • 승인 2012.04.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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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내의 한약방을 뒤지다 도무지 페니실린을 구할 수가 없자 형식은 병원을 찾아 다녔다. 읍내는 무엇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없어 보였다. 왜인과 눈이라도 마주치며 살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무조건 왜놈앞잡이였다는 낙인을 찍어 그의 재산을 무자비하게 빼앗고는 잔인하게 죽여 버리는 것이었다.

‘화성의원’이라는 간판을 본 형식은 눈을 번쩍 떴다. 마음속으로 이번에는 제발 페니실린을 구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빌었다.

아직은 하루의 진료가 끝날 시각이 아니었는데 문은 안으로 굳게 잠겨 있었다. 저절로 터져 나오는 한숨을 누르며 형식은 사방으로 목을 돌려댔다. 다른 병원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읍내에 양의가 운영하는 의원이 딱 두 군데 있었는데 한 군데는 이미 다녀왔다. 그곳의 의사는 바로 어제 왜놈 순사를 치료해 주곤 했다는 이유로 사람들 손에 맞아죽었다고 했다. 가난한 우리나라 환자가 찾아갔을 때도 친절하게 의술을 펼쳤더라면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피로 병원을 물들이지 않아도 되었을까?

‘빈손으로 돌아갈 순 없어.’

형식은 다시 한약방을 찾아보기로 했다. ‘화성의원’의 옆벽을 끼고 그 뒷골목으로 들어간 그는 아주 작은 삐걱거림에 이끌려 귀를 바짝 세웠다. 한 사람 정도 드나들 수 있을 정도의 샛문 같은 것이 비밀스레 열리고 있었다.

‘비밀통로!’

형식은 화성의원 건물을 보며 중얼거렸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자가 긴장한 얼굴로 그 문에서 나오고 있었다.

“선생님!”

본능적으로 의사라고 판단한 형식은 무작정 상대에게 와락 달라붙었다.

“누, 누구신가?”

의사는 잔뜩 경계의 눈빛으로 형식의 아래 위를 훑었다. 흥분한 군중들에게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라서 병원문도 안 열고 안에서 꼭꼭 숨어 지내다 바깥 동정을 살피러 살짝 나오던 참이었다.

“저 모르시겠어요? 얼마 전에 저희 할머니 모시고 왔었잖아요?”

형식은 완벽한 거짓사실을 있었던 것처럼 능청스럽게 엮어 반문했다. 노파가 몸져누웠을 때 한약방에 가서 약 몇 첩을 지어오곤 했던 터여서 양의와 안면을 틀 기회가 없었다.

“아, 그래요. 그러고 보니 생각이 나는군. 할머니께선 좀 어떠신가?”

눈치 빠른 의사도 형식의 ‘아는 체하기’ 작전에 얼른 장단을 맞추어 주었다.

“갑자기 또 몸이 안 좋아지셨습니다. 페니실린 좀 주세요.”

뜸들일 여유가 없어서 즉석에서 페니실린타령을 털어놓았다.

“페니실린을요?”

의사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약만 주시면 주사는 제가 놔 드리겠습니다.”

형식은 불쑥 그렇게 말했다. 정말이지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까 별 희한한 자신감이 다 용솟음치는지 모르지만 주사를 놓을 자신이 있었다. 페니실린이 철주를 살렸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어서인지 그 약만 가져가면 민숙누나를 꼭 살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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