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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도 찬비 내린다해서 한우산이라던가(27) 한우산을 넘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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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5.3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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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봄은 유난히도 더디게 오더니만 꽃바람만 언뜻 불고 꿈길 같이 떠나자 여름은 미리부터 창밖에서 턱을 괴고 있었던지 어느새 녹음방초가 싱그럽게 푸르렀다. 연두색의 어린 새순들이 초록으로 물들면서 풀냄새의 싱그러움이 숨이 갑실 듯이 짙어지며 수줍음도 겸손함도 찾아볼 수 없고 감추거나 가린 것도 없이 속내까지 활짝 열고 자기 발산의 극치를 품어내고 있어 오월을 계절의 여왕이라 했던가. 산야의 빛깔이 하루가 다르게 또렷또렷하게 짙어지고 있어 초록과 동색으로 신록에 물들고 싶어서 길을 나섰다.

어제 같은 오늘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지루함 속에서 삶의 고단함이 오늘따라 유난히 버겁다는 생각이 들 때면 힘겨운 일상의 멍에를 잠시 벗어 놓고 길을 나서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또 다른 장소에서 새로운 만남으로 동반자가 되어 멀어져 간 작은 꿈들을 불러 모아 화해와 화합을 이루어 다정한 하나가 다시 되어 멋있는 나그네로 거듭난다. 멋진 나그네가 되고 싶거든 아무것도 챙길 것 없이 홀가분하게 나서도 좋은 길이 있다 ‘나비야 청산 가자 범나비 너도 가자’ 하고 누구와도 함께해도 언제나 좋기만 한 한우산 열두 굽이의 고갯길을 넘어볼 요량으로 길머리를 잡았다.

한우산을 오르는 길은 의령군의 궁류면 쪽에서 1041번 도로를 따라 벽계유원지를 지나 찰비계곡으로 오르는 길과 칠곡면이나 가례면 쪽에서 1013도로를 따라 오르는 길이 있지만 칠곡면 쪽의 신전삼거리에서 오르는 길이 제일 멋진 길이다. 신전삼거리에서 신전저수지를 왼쪽에 끼고 새로 확장포장된 2차선 도로인 한우산 초입에 들어서면 적단풍 가로수가 좌우로 줄지어 늘어서서 길손을 반기는데 초록빛의 수목을 바탕색으로 깔고 자색빛깔이 유난히도 짙어서 마치 사열이라도 받는 듯이 의기양양해지는 기분 좋은 길이다.

오른쪽의 자굴산 기슭과 왼쪽의 한우산 기슭이 나직하게 손을 맞잡은 계곡길이라서 굽이굽이 층층이 돌아가며 오르다보면 이대로 가면 하늘까지라도 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좌로 돌면 이내 우로 돌아야하지만 운전대만 붙잡고 아무 생각 없이 오르기만 해야 하는 위험스러운 길이 아니고 모롱이의 경사가 완만하고 도로의 폭이 넓어서 좌로 돌면 좌측의 풍광을 감상하고 우로 돌면 우측의 정취에 젖어 중간쯤에서 차를 세우고 굽이굽이 거슬러 오른 구불구불한 길을 내려다보노라면 어찌도 살아온 인생길 같아서 가슴속이 찡- 해지고 들머리에서 의기양양하며 우쭐했던 기분이 차분하게 가라앉으며 겸허해진다.

비로소 건너편 중턱의 커다란 암벽들이 벌써부터 길손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고서야 무안해져서 오지랖을 여몄다. 신선들이 네다섯 혹은 예닐곱씩 모여서 길손을 지켜보는 것일까 아니면 폭이 너른 하얀 치마를 깔고 앉은 산신할미가 위태위태한 삶의 고행길을 지켜봐 주는 걸까? 희끄무레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암벽들은 울창한 소나무 숲속에서도 기웃거리지 아니하고 초록빛이 짙어버린 잡목 사이에서도 틈새를 비집고 넘보지도 아니하고 고고하게 자태를 흩트리지 않고 근엄한 모습으로 지켜보고 있어 감춘 것도 없지만은 속내까지 들켜버린 것 같아서 까마득하게 잊었던 지난날들이 새삼스럽게 뒤돌아 보이며 더러는 미안하기도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유난히도 미워했던 사람도 없었지만 더 가까이 다가갔어도 좋았으련만 하는 아쉬움이 남았음을 일깨우게 해준다.

이산 저산의 암벽들은 억겁의 연륜으로 인생사 고작 칠십을 허물없이 살라고 일러주고 섰는데 미련한 길손은 초록빛 골짜기에 깊숙하게 묻혀서 또 한 굽이를 돌면 또 다른 생각들로 푸른 숲속을 휘젓고 헤맨다. 몇 굽이를 돌았는지도 잊어버리고 그저 먼 과거 속을 헤집고 긴 세월을 달려온 듯한 무렵에야 고갯마루의 작은 주차장에 닿았다. 크고 작은 산들을 아래로 굽어보며 차를 세우고 내딛은 발끝의 감각은 온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져서 두둥실 뭉게구름을 탄 듯하다.

산마루에 우뚝 서서 굽이돌아 거슬러 올라온 꼬부랑길을 내려다보니 은빛 비늘을 번득이며 승천을 하려는 용틀임인지, 신선이 휘갈겨 써버린 갈 지자(之)의 멋스러움인지 모롱이마다에는 힘이 넘치고 완만한 경사면에는 느긋함이 깔려 있고 멀리 보이는 들머리 길에는 아련한 그리움이 잔잔하게 일렁이고 있어 젊은이가 오르면 힘이 넘치는 길이고 중년이 오르면 겸손함을 익히는 길이며 노인이 오르면 마음을 비우게 하는 길이다. 

고갯마루에는 길을 내느라 절개한 자락을 이어 다리를 놓아서 산행길과 야생동물 통행로를 만들어 차량들은 굴다리 밑으로 지나서 가례면으로 넘어가는 1037번 도로이고 왼쪽으론 한우산 정상으로 가는 임도와 갈라지는 삼거리이다. 삼거리 마루턱엔 떠나지 못하는 시내버스 한 대가 굽이진 오르막길을 내려다보며 승객이 북적대던 옛 영화를 못 잊어 하염없는 추억 속을 헤매고 있다. 탑승구로 오르니까 원두커피를 볶는 냄새가 그윽한데 꾸밈없는 웃음에 나직한 목소리의 중년 아줌마가 이웃처럼 반긴다. 간판 없는 레스토랑이다. 받아 쥔 종이컵의 커피맛이 청정고산의 청량한 공기에 녹아 야릇한 향기가 전신으로 흐른다.

한우산 정상을 향해 임도를 따라 차를 몰았다. 임도라지만 포장도 잘 돼 있고 경사도 완만하며 오가는 차량과의 교행도 어렵지가 않다. 느긋하게 풍광을 즐기며 올라도 10분 안짝이다. 한우산 정상의 코밑에 주차장이 마련돼 있고 2층 누마루의 정자가 전망대를 대신하며 아담하게 섰다. 정상을 서쪽에 등지고 삼면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데 비 온 뒤끝이라서 연무가 시야를 가려서 점점이 작은 산봉우리와 겹겹첩첩 가까운 산들이 알알이 박혀 있다. 여기서부터 정상까지는 쉬엄쉬엄 걸어도 10분이면 충분한 거리이고 나무계단이 경사가 완만하여 누구나 어떤 차림이든 상관없이 오를 수 있다. 철 늦은 철쭉꽃이 시절이 아쉬운 듯 시들어 가는데 해발 836m라고 일러주는 한 길 높이의 한우산 정상의 푯돌이 사방으로 겹겹이 둘러싼 산봉우리를 굽어보며 우뚝 섰다.    

멀리 지리산과 가야산을 건너다볼 수 있고 정상 코밑까지 차가 오르므로 패러글라이딩을 즐기는 인간새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이들이 활공하는 날에는 알록달록한 오색꽃이 하늘을 수놓는다니 철쭉꽃말고도 또 하나의 장관을 볼 수 있다 하여 후일을 기약하고 발길을 돌리는데 서늘한 청량감이 전신을 휘감는다. 오죽했으면 한여름에도 차가운 비가 내린다 하여 한우산이라 했겠는가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초록으로 물들어 버린 찰비계곡으로 하산할 요량으로 활공장 쪽으로 차를 몰았다. 정상 바로 아래의 9부 능선쯤으로 길게 평지 같은 길은 활공장 아래의 주차장에서 모롱이가 되어 멋지게 갈 지자(之)를 그리며 비스듬히 내려가면 벽계삼거리에서 안내 표지판이 차를 멈추게 한다. 영화 ‘아름다운 시절’에서 덜컹거리는 소달구지에 걸터 앉아 떠나가며 긴 여운을 남긴 마지막 장면의 촬영장이었다는 벽계삼거리이다. 삐걱거리는 수레바퀴 소리가 어디선가 들리는 듯한데 멀리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서 지금쯤은 어디만큼이나 가고 있을까?

벽계삼거리에서 좌회전을 하여 찰비계곡길로 내려섰다. 이 같은 길을 두고 구절양장(九折羊腸)이라 했던가. 굽이굽이 돌고 돌면 또 한 굽이가 기다리고 있다. 호젓하면서도 청량감이 넘쳐나는 아름다운 길이라서 혼자 넘기에는 아까운 길이며 비경을 즐기기도 혼자서는 미안한 길이다. 개울물 소리가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소리에 화음을 맞추느라 또랑또랑한 소리로 바지런함을 떤다. 한 굽이를 돌 때마다 개울은 점차 계곡으로 몸집을 불리면서 커다란 바윗돌이 저마다 기선제압을 하려는 듯이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솟아오르고 작은 폭포수들은 무슨 사연이 그리도 많은지 제 할 말이 많아서 끝도 없이 쉬지 않고 바쁘기만 하다. 이들을 지켜보는 산중턱의 괴암괴석들은 모서리마다 날을 세우고 엄청난 높이로 하늘을 향해 삐쭉삐쭉하게 치솟았다. 모롱이를 돌 때마다 동양화의 병풍을 한 겹 한 겹 펼치듯이 제마다 다른 풍경들을 겹겹이 펼쳐내고 있어 무릉도원이 여긴가 싶다.

멀리 벽계저수지가 석양에 물들어 발그레한 물빛으로 고요한데 나뭇잎을 스치던 바람소리도 찰비계곡의 어둠살을 깔고 정적만을 남긴 채 잠이 드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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