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파는 당장 달려가서 손자를 끌고 와야 한다고 의지를 확실하게 밝혔다.
“할머님, 한번 믿어봅시다.”
그리고 진석은 뇌리를 스치는 불길한 생각을 떨어버리듯 머리를 짧게 가로 저었다. 아닌 게 아니라 녀석이 이 밤중에 아주 먼 곳으로 달아나 버린다면 무슨 수로 찾아내겠는가?
“우리 손자 어디 있는지 그것만 가르쳐 줘유. 같이 가 달라는 부탁 같은 건 하지 않을 테니까유.”
급기야 노파는 서운한 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볼멘소리를 냈다.
“지금 곧 통행금지가 될 텐데 어떡하시려고?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달려가서 꼭 데려오겠습니다.”
진석은 결근할 궁리까지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새끼 하나 때문에 한 자라도 더 배우겠다고 학교 온 남의 자식들을 놀게 할 수는 없쥬. 경찰관한테 부탁을 해 보려구유.”
진석의 호의에 금방 서운한 마음이 풀리고 만 노파는 눈시울까지 붉히고 있었다.
“할머님, 그건 절대로 안 됩니다.”
진석은 부지중에 목청을 높였다.
“안 되다니유?”
노파는 노파대로 진석을 향하여 놀란 눈을 홉떴다.
간절한 마음으로 설명한 진석은 복잡한 마음을 달래듯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길게 내뿜었다.
‘필중아, 약속은 꼭 지켜야 해. 누가 뭐래도 난 널 믿을 것이다.’
비밀스런 대화를 날숨으로 버무렸다.
캄캄한 방안에 혼자 남은 필중은 또 벌떡 일어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친구들을 만날 자신이 없었다. 더 자세히 말하면 그들 속에 끼어들 자신이 없었다. 필중은 눈앞에 돋아나는 담임의 모습을 피해 목을 옆으로 돌렸다.
녀석은 기어이 방문 고리를 잡았다. 담임에게 노출된 이상 이곳 암자는 더 이상 숨어 있을 곳이 못 된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아이고 아이고, 사람들아, 이 늙은이 소원 좀 풀어줘유.”
노파는 넋이 나가버린 얼굴로 마당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진정하세요. 낼 새벽에 제가 할머님을 모시고 같이 가겠습니다.”
보고만 있던 민숙이가 나서서 노파를 달랬다.
“큰일 날 소리! 어디 여자끼리 산엘 가겠다고 그래?”
진석은 놀란 눈으로 민숙을 흘겼다.
“허허, 낼 새벽? 그 놈은 이미 그곳에 없을 껴.”
한탄스레 중얼거린 노파는 삶의 의욕을 완전히 상실한 사람이 되어 그대로 마당에 드러누워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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