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저편 <119>
오늘의 저편 <119>
  • 경남일보
  • 승인 2012.06.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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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숙의 정체를 알 수 없었던 필중이 아버지는 목을 반만 끄덕일 수는 없어서 그냥 허공으로 목을 돌렸다. 그러다간 별안간 양미간을 찌푸렸다.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아내의 얼굴이 눈앞을 가린 것이었다. 그가 나병 징후를 처음 보였을 때 혼자만 멀쩡하게 잘 살아보겠다고 가족을 버리고 달아나 버린 여자였다.

 “워매, 그런께 시방 뭐란가? 형씨 어메가 맛나는 것 챙겨서 여그까지 가져 오셨다 이거 아니란가?”

 볼멘소리로 부러워하는 멍울 나환자의 동공이 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필중이 아버지는 작은 한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상대의 작은 오해는 중요하지 않았다. 가지고 있던 돈까지 탈탈 털어서 호주머니에 찔러 넣어주던 어머니를 생각하며 눈을 자꾸 껌벅였다. 기어이 동공 밖으로 흘러넘치는 눈물을 뭉툭한 손으로 찍어냈다.

 “울 엄니는 워떻게 지내고 기신가? 보고자퍼 죽거당께.”

 양말 나환자도 덩달아 아이처럼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소록도로 끌려갈 때 울며불며 맨발로 따라오던 어머니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 것이었다.

 보고 있던 과묵한 나환자는 옆에 있던 소나무를 끌어안더니 어깨를 들먹이며 울음을 삭혀내고 있었다.

 “아야, 뭔 쑥놈들이 그러코롬 짜대냐 짜대긴. 그만들 혀거라이. 징상스럽다.”

 양말 한센병자가 제일 먼저 몸을 산속으로 돌렸다.

 멍울 나환자와 과묵한 문둥병자도 몸을 산으로 돌렸다.

 필중이 아버지는 아들과 어머니가 사라진 쪽을 몇 번씩이나 뒤돌아보며 그들과 함께 산으로 들어갔다.

 갈바람이 석양에 물든 뒷산 등성을 타고 학동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누릇누릇하게 익은 정자나무 잎들은 앞을 다투어 땅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흥, 이 바보야, 왜 이러고 사니?’

 바람에 흔들리는 사립문 소리에 반사적으로 눈을 돌렸던 정자는 자기 자신을 향하여 코웃음을 쳤다. 마당 끝에 끼치기 시작한 산그늘을 보며 달랠 길 없는 외로움을 이빨로 깨물었다.

 ‘또 원수 같은 밤이 오는구나!’

 정자는 밤이 정말 싫었다. 해거름부터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다보면 밤이 깊어가기 전에 베갯잇이 축축하게 젖어버리는 것이었다.

 “악아, 바람이 차다. 이 할미가 재밌는 옛날이야기 한 자루 해줄까?”

 뻥 뚫려 버린 손자며느리의 가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던 형식의 할머니는 정자를 불렀다.

 ‘쯧쯧, 에그 불쌍한 것. 새파란 것이 허구헌날 저 무슨 죄인고? 설마 아직도 민숙이 년 꽁무니를 따라다니고 있는 것일까?’

 노파는 안타까이 혀를 찼다. 예전에도 손자가 시골집에 뻔질나게 들락거리는 편은 아니었다. 그렇더라도 장가를 든 놈이 색시만 시골집에 남겨두고 나 몰라라 하는 건 다 알조가 있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노파는 민숙이가 얄미워지는 것이었다. 

 “예, 할머니.”

 할머니의 자리끼를 챙겨 든 정자는 마루로 성큼 올라섰다. 곰팡내 물씬 나는 옛날이야기에 귀가 솔깃해지는 건 아니었다. 독수공방하는 손부의 신세를 안타까워하는 할머니의 마음이 너무 잘 보여서 차마 외면할 수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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