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저편 <120>
오늘의 저편 <120>
  • 경남일보
  • 승인 2012.06.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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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잎이 땅에 내려앉는 소리에 끌려 정자는 또 사립문으로 목을 돌렸다. 민숙의 집 근처에서 서성이고 있을 남편의 모습이 눈앞에서 돋아나는 바람에 그녀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민숙의 결혼 소식을 들었을 때 정자는 ‘이젠 살았다’라고 남몰래 부르짖었다. 민숙의 결혼식이 있던 그날 아침엔 속없는 웃음이 입가에 걸리기도 했다.

그러나 정자는 보고 말았다. 진석과 민숙이가 초례청에 마주보고 서던 그때 담배연기를 훅훅 내뿜던 신랑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그리고는 그 혼례식이 다 끝나기도 전에 목을 아래로 떨어뜨리곤 서울로 달아나 버렸다.

‘세상의 신랑들은 알고 있을까. 다른 여자를 그리며 눈물짓는 남편을 지켜보아야 하는 각시의 아리고 쓰린 마음을.’

‘말라비틀어진 민숙이보다 백배 천배는 더 낫구먼.’

방안으로 동글동글한 얼굴을 들이미는 정자를 보며 노파는 또 민숙이를 원망했다. 팔이 들이굽는 법이어서 그런지 백번을 보아도 민숙이보다 정자가 더 나아 보이는 것이었다.

‘오늘은 또 무슨 얘기를 해주어야 할까?’

갑자기 얘깃거리가 궁해진 노파는 손자며느리의 눈치를 살피며 머릿속을 더듬었다. 그 동안 호랑이, 여우, 곶감, 효녀, 원귀, 부처, 도깨비 등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하고 또 하고 해서 이젠 씨가 말라버린 것이었다.

“악아, 내일 나랑 함께 서울 가자.”

엎치락뒤치락 생각과 싸우고 있던 노파는 불쑥 그렇게 말했다. 손자가 시골집에 오지 않는 이유는 딱 한가지 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민숙이가 학동에 있었을 땐 가랑이가 찢어져도 명절엔 시골집에 코끝을 보여주었다.

‘매구 같은 년, 언제까지 내 새끼 맘을 꽉 틀어쥐고 있을 거야?’

민숙의 집 근처에서 서성이곤 할 손자의 모습을 그리며 노파는 입언저리를 부르르 떨었다.

처음 학동을 떠났을 때도 형식은 몇 년 동안은 시골집에 소식조차 보내지 않았다. 노파는 민숙이가 서울에 있기 때문에 손자가 학동에 발길을 뚝 끊은 것이라고 그렇게 야무지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 아뇨 할머니!”

귀가 번쩍 뜨인 정자는 뜻 모를 소리를 주워 넘기며 얼굴을 붉혔다.

“바쁜 네 신랑이 움직이는 것보다 할 일 없는 우리 둘이 움직이는 편이 낫겠구나. 낼 첫차로 올라가자꾸나.”

세상없어도 증손을 만들어서 와야겠다고 노파는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자식 놓고 살다 보면 없던 정도 생기겠지?’

남몰래 주먹을 불끈 쥐기까지 했다.

“네, 네 할머니!”

정자는 벅차오르는 감격을 숨기려다 까닭 없이 콧날을 벌름거렸다.

“악아……. 아니다.”

앞뒤 없는 생각에 사로잡힌 노파는 뜬금없이 손자며느리를 불러놓고야 머리를 가로저었다.

“왜 그러세요? 할머니……

정자는 할머니의 안면을 재빨리 핥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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