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오늘의 저편
<135>오늘의 저편
  • 경남일보
  • 승인 2012.07.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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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오늘의 저편

“아주머니 지금 서울에 난리가 났어요.”

“뭐 난리? 무슨 난리?”

화성댁의 눈에선 놀란 불이 번쩍 튀었다.

“오늘 새벽에 이북 빨갱이들이 쳐들어왔대요.”



도망치듯 몸을 돌리는 어머니를 보며 민숙은 입술을 깨물었다. 죽었으면 죽었지 가여운 어머니한테 남편의 발병사실을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여생을 사위에 대한 행복한 착각에 빠져 살게 할 수는 있어도 절망에 빠져 몸부림치게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인정머리 없는 년, 잠깐 들어오라고 하면 어디가 덧나냐? 이 어미 언제 네 년 붙들고 수다 떠는 거 봤니?’

화성댁은 너무 쌀쌀하기만 한 민숙의 태도가 못내 서운했다.

‘독한 년, 이 어미는 안중에도 없는 년, 아니, 내가 왜 이러나? 홀몸도 아닌 아이한테 욕설을 해선 안 되지. 암 안 되고말고.’

딸을 원망하다 말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아냐. 뭔가 이상해.’

별안간 몸을 뒤로 홱 돌리며 의혹이 가득한 눈으로 목을 갸웃했다. 딸을 보고난 후 번번이 느끼는 것이지만 그 얼굴이 어둡다는 사실이었다.

‘산달이 되어가니까 이것저것 걱정이 돼 그런가? 썩을 년 어미 가까이 있을 때 요것조것 의논하고 기대고 하면 좀 좋아?’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슬며시 웃음을 빼물었다. 무슨 일이든 혼자 힘으로 해내려는 딸에게 소외감이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론 마음이 놓이는 것이었다.

‘저 사람은 왜 벌써 오누?’

몸을 집으로 돌리다 무심결에 정자나무 아래로 눈길을 그은 화성댁은 정자를 본 것이었다.

정자는 바로 어제 서울에 다니러 갔다. 예전과는 달리 요즘은 한번 가면 일주일 정도 지낸 후 돌아왔다. 5살 난 딸 순희는 영악스러울 정도로 애교가 철철 흘러넘쳤다. 서울 가기만 하면 아비의 무릎을 차고 앉아 그 혼을 쏙 빼놓는다는 소문이 학동까지 뻗치곤 했다.

“딸네 다녀오세요? 아주머니 지금 서울에 난리가 났어요.”

정자는 일없이 남의 사연이 궁금해서 기다리고 서 있는 화성댁을 보며 바로 소식을 전해 주었다.

“뭐 난리? 무슨 난리?”

화성댁의 눈에선 놀란 불이 번쩍 튀었다. 왜인들이 남의 나라에 들어와 온갖 지랄발광을 할 때 지긋지긋하도록 겪어온 난리가 아니던가? 난리라는 말만 들어도 몸서리가 처지는 것이었다.

“오늘 새벽에 이북 빨갱이들이 쳐들어왔대요.”

“뭣 빨갱이!”

왜놈들이 싸질러놓고 간 똥들이 아직도 여기저기 늘려있는 판이었다. 이번엔 빨갱이라니 화성댁은 눈앞이 노래지고 있었다. 빨갱이의 악독기질은 말로만 들어도 몸서리가 쳐지고 있었다.

“빨리 피난가실 준비하세요. 민숙 씨한테도 빨리 알려 주시구요.”

정자는 딸의 손을 잡고 집으로 종종걸음을 쳤다.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순희 아버지는 미곡상의 곡식들을 숨겨놓고 바로 뒤따라 올 것이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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