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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 (241)<2>김동리, 다솔사 그리고 등신불 축제
강민중  |  jung@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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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7.20  17:0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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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 (241)
<2>김동리, 다솔사 그리고 등신불 축제 
 
올해는 소설가 김동리 탄생 백 주년이다. 김동리(1913-1995)는 경주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영면했다. 동리기념사업회(회장 김지연, 산청출생, 진주여고 졸)에서는 전집발간, 심포지엄, 뮤지컬, 음악회, 전시회 등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경주 동리목월 문학관 중심으로 행사가 펼쳐지겠지만 사천 곤명면에 있는 다솔사 에서도 동리문학제가 열려야 한다고 필자는 늘 생각해왔다. 한 3년 되었을까, 박노정, 김경 시인들과 더불어 다솔사 주지 스님을 뵙고 그런 희망에 대해 의견을 나눈 적이 있었다. 그때 스님의 전향적인 사고와 의지를 읽고 이제 다솔사도 신기운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다솔사에는 일제 때 만해 한용운 시인이 출입하면서 지하 독립 단체인 ‘만당’을 조직했고 주지 최영환(최범술)의 배려로 김동리의 맏형인 김범부, 동국대 총장을 지내는 김법린 등 당대의 사상가들이 운집했던 곳이다. 필자는 이 난에서 다솔사는 단순한 사찰이 아니라 민족 사상의 한 거점이기도 하고 독립 활동의 거점이기도 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시인 고은도 어디선가 다솔사를 가보지 않고 한국 근대사를 이야기할 수 없다고 한 것은 지나친 표현이 아니라 하겠다.

김동리는 1935년 ‘화랑의 후예’로 조선중앙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에 당선된 뒤 그해 봄에 좀 더 조용한 곳에서 창작에 전념하리라 작정하고 맏형이 있던 다솔사를 찾았다. 서너 달 책을 읽거나 소설 소재를 찾아다니다가 주지 스님이 해인사 재무를 맡아 일시 옮길 때 맏형과 함께 해인사로 옮겨 갔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재당선하자 김동리는 서울에 옮겨가 친구를 사귀고 잡지사들을 찾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1937년 봄 다시 다솔사로 돌아왔다. 다솔사에서 가까운 원전마을에 광명학원을 세워 그곳 강사로 김동리를 불렀기 때문이었다.

광명학원 시절 김동리는 진주여고를 나오고 함양 모 초등학교 교사로 있던 마을 처녀 김월계와 사귀었다. 이때 김동리는 처가의 요청으로 천주교 영세를 받고 그곳 천주교 공소에서 혼배예식을 올렸다. 그의 세례명은 가브리엘이었다. 지금 그 영세 서류는 그 공소의 본당이었던 진주 옥봉천주교회에 보관되어 있다. 김동리는 아들 다섯을 낳아 기르며 행복해했다. 징용에 차출될 기미를 알고 쌍계사 건너편 친구 집으로 피신하여 있던 6개월여를 제외하고 사천읍의 모 회사에 취직되고, 청년회 회장이 되고 이어 광복을 맞아 우익 측 강사로 삼천포에서 강연하다가 테러를 맞이하기까지 김동리의 사천 생활 통산 기간은 11년이나 되었다.

김동리는 다솔사에서 배우고 체험한 것이 모티브가 된 작품을 계속 썼는데 ‘황토기’, ‘등신불’, ‘불화’ 3부작, ‘극락조’, ‘저승새’, ‘찔레꽃’, ‘눈 내린 저녁에’ 등을 꼽을 수 있다. 김동리의 작품들은 사상이나 정서의 토대가 다솔사, 서포 일대의 무속이나 전통사상이 되었고 작품의 현장 배경은 그가 태어난 경주 일대가 되었다. 그러니까 경주와 다솔사, 사천은 김동리 작품을 움직이는 양 수레바퀴라 보면 좋을 것이다. 이 정도면 사천에서 김동리문학제를 연다는 것이 절대 공론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할 것이다.

명작들이 쓰여진 배경이 확실히 드러난 장소는 작품들의 명성과 함께 작품외적 이미지나 주제 형성을 시시각각 이룩해 가는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볼 때 다솔사는 서포 곤명의 마을, 들녘과 더불어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거기다 어떤 형태로든 김동리 관련 축제를 열게 됨으로써 작품외적 변수들이 생겨나고 이미지나 정서적인 공감대를 확대 재생산하게 될 터이다. 기존의 축제장인 ‘메밀꽃 필 무렵’의 봉평이나 ‘토지’의 평사리, 김삿갓의 영월 등을 떠올려 보면 이 점 분명해진다 하겠다. 그런 측면에서 사천시의 ‘등신불 축제’의 기획과 시행을 주목해 보고자 한다.

말이 난 김에 사천시나 문인단체에서는 사천 출신 시인 조향(趙鄕, 1917-1985)이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 주었으면 한다. 조향은 곤양면 환덕리 출생으로 진주고보, 대구사범, 일본대학 예술학원 등을 수료했고 동아대학 교수를 거치는 동안 40년대 말 ‘후반기 동인’ 멤버로 한국 모더니즘의 대표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 사람이다. 문학사를 아는 사람 치고 조향의 업적을 기리지 않는 데 대해 무감각하게 지나가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한국의 초현실주의 아래 이상의 뒤를 따르는 사람은 조향이다. 재평가와 기리기가 현실로 다가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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