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가득한 산길 '폭염'도 잠시 잊다
초록 가득한 산길 '폭염'도 잠시 잊다
  • 최창민
  • 승인 2013.07.2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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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일보 선정 100대명산 <62>함양 기백산
20130721기백산 (48)
기백산 누룩덤과 금원산줄기
 
 
 
연암은 1780년(정조4년) 청 건륭제의 칠순 축하사절단 박명원을 따라 베이징과 열하지역을 여행한다. 당시 조선은 청을 오랑캐라하여 새우눈을 뜨고 본 시기였지만 그는 청나라 여행을 통해서 발달한 선진문물과 제도 등을 두루 살핀다. 요동에서 벽돌을 쌓아 만든 건축물이나, 가마구조를 관찰했다. 특히 이동수단으로 바퀴를 단 수레를 이용한 것이나 이를 응용한 물레와 탈곡기 기술에 대해 조예 깊게 조사하고 관찰했다.

조선에 돌아온 그는 3년 후인 1783년 여행을 통해 터득한 청의 실용적이고 효율적인 선진문물을 바탕으로 책을 낸다. 조선 최고의 실용 여행서 연암의 ‘열하일기’다. 단순히 여행기로만 그치지 않고 우리생활에 직접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것으로 경험에 기초한 여행기록이다. 그러나 조선의 정치적 배경이 녹록치 않아 이 책은 정조의 비판을 받는다. 요즘으로 치면 현대의 자동차신화나 삼성의 휴대전화 신화쯤으로 기록될 수 있는 획기적인 일로 ‘파이팅, 조선’의 기치가 될 수 있는 일이었지만 빛을 못본 것이다.
 
그렇다고 그의 창작열과 엔지니어의 본능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청에서 돌아와 열하일기를 펴낸 뒤 9년만인 1792년 함양 안의현감으로 부임했다. 그의 흔적이 함양 안의에 있다. 안의현감 재직 시 수레를 응용해 물레방아의 형님뻘인 용골차를 제작했다. 열사람 몫을 한 두사람이 효과적으로 노동을 할 수 있게 한 것이다. 현재 함양에 물레방아가 많은 내력이 그렇다.

안의면 기백산 기슭 용추계곡 입구에 연암의 법고창신과 실용사상을 기리는 동상과 함께 사암정 등 물레방아 공원이 조성돼 있다. 연암이 최초로 만들었다는 용골차를 기념하기 위해 2004년 함양군에서 조성했다.
▲등산코스 장수사터 일주문→도수골→기백산→책바위(누룩덤)→갈림길→시흥골 하산→사평마을→지장골→용추사→용추폭포→일주문 원점 회귀. 10km에 5시간이 소요됐다.

▲기백산(1331m)은 거창 안의면과 위천면에 걸쳐 있으며 1983년 군립공원으로 지정됐다. 백미는 정상부근에 큰 바위가 켜켜이 쌓여 있는 바위, 누룩을 쌓은 것처럼 생겼다하여 누룩덤이라고도 한다. 옛 이름이 지우산(智雨山)이다. 김정호의 청구도에는 기박산 (旗泊山)으로 돼 있다.

▲기백산 기슭 연암의 흔적에 발길이 머문다. 산행 들머리는 장수사터 일주문. 취재팀은 정각 오전 9시에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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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룩덤

5분 정도 큰길을 따르면 감나무 바로 옆에 샛길이 나온다. 직진하면 지장골을 끼고 사평 수망령으로 곧장 가는 큰길. 오른쪽에 낡은 등산 안내판 앞으로 등산로가 열려 있다.

처음부터 빛 한줄기가 땅바닥에 온전히 닿지 못할 정도로 울창한 숲이다. 태양을 피하는 산행이 시작된다. 수고는 높은 편이지만 웃자람 때문인지 나무둥치는 별로 크지 않다.

출발 25분 만에 ‘기백산 3.8km 이정표’가 있는 능선 휴식처에 닿는다. 도시의 공원에서나 볼 수 있는 나무의자 서너개가 산으로 올라와 있다. 이때부터 능선 너머 도수골의 물소리가 들린다. 등산로는 도수골 물길을 만난 뒤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워지기도 하고 건너기도 하면서 꾸역꾸역 정상으로 향한다.

‘기백산 2.2km’ 이정표가 있는 지점에 당도한다. 비교적 이정표가 잘 돼 있어 좋긴 한데 낡은 것이 흠이다.

들머리의 입간판은 너무 낡고 색이 바래 알아보기가 쉽지 않고 중간 중간에 목재로 만들어 세운 이정표는 썩어 땅바닥에 뒹굴고 있다. 함양군에서 보수공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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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안내하는 새



산 중턱에서 동물의 움직임을 포착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새 한마리가 사람이 다가가도 놀란 기색 없이 거리를 유지한 채 총총 걸음으로 먼저 걸어간다. 새는 등산객을 안내하듯 올라가고, 멀어지면 서기를 수차례 반복하다 어느 순간 ‘포르르’ 날아갔다. 새가 날아 앉은 곳에 큰 동물의 움직임이 포착돼 긴장하고 지켜봤더니 산돼지 한마리가 쏜살같이 숲으로 사라졌다.

산행객이 없는 주중 산행에다 첫 산행에 살아 있는 동물을 본 것은 행운이다.

‘기백산 정상 1.3km’이정표의 능선 길에 올라선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수목의 키는 작아지지만 그래도 숲이 울창해 햇빛을 잘 가려준다.

가마솥 같은 찜통더위가 계속되는 날씨에 산행계획을 세울 때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강렬한 태양이 논스톱으로 내리쬐는 날씨는 산행객을 곤혹스럽게 한다. 챙 큰 모자와 고글을 준비해도 온몸으로 쏟아지는 뙤약볕을 피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여름 산행지는 숲이 울창한 원시림이나 계곡이 있는 곳을 선호하게 된다.

이 산은 정상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 등산로가 ‘나무와 숲 등 원시림’으로 들어차 햇빛을 피하면서 초록의 터널 속으로 산행할 수 있다. 거기에다 물 맑고 시원한 ‘지장골과 용추계곡’이라는 천혜의 계곡을 끼고 있어 여름산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산행 중 스마트폰 뉴스 속보에 ‘함양 거창지역 폭염경보’ 소식까지 들린다. 숨 막히는 여름에 나무그늘 속으로 산행을 즐길 수 있는 것은 분명 호강이다.

2시간 만에 정상을 앞두고 마지막 능선에 올라선다. 이곳에서부터는 천지 사방을 볼수 있는 전망대 바위가 연달아 나타난다. 햇살이 아무리 뜨거워도 기백산 조망의 특권까지는 포기할 수 없다. 푸른 하늘에 마음이 열린다. 모든 산이 기백산을 중심으로 배치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주변의 황석산도 월봉산도 금원산도 심지어 덕유산과 지리산도 그렇다. 손을 휘저으면 닿을 듯한 수천마리의 잠자리 떼가 하늘을 날고 있다.

2시간 20여분 만에 기백산 정상에 선다. 인근 금원산으로 이어지는 산릉과 누룩덤 위로 구름 그림자가 지나면서 마치 산이 살아 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는 느낌이다. 누룩덤 방향이 사진촬영의 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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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서 휴식 후 금원산 방향으로 발길을 옮긴다. 키작은 관목과 초목이 어울린 등산길은 편안하고 아늑하며 시원한 그늘까지 제공한다. 이 산의 백미 누룩덤. 위험해 보여서인지 우회하거나 허투루 지나는 경우가 있는데 한번 올라가 보기를 권하고 싶다. 다가서면 웅장하기 그지 없고 올라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발 아래 금원산 자연 휴양림 보이고 인근 현성산과 금원산 멀리 함양읍 시가지가 조망된다. 데크로 만들어진 전망대를 지나면 고즈넉한 길이 이어진다.

출발 3시간 40여분 만에 ‘금원산 2.9km 기백산 1.5km’ 이정표가 있는 갈림길을 만난다. 장수사터까지 원점회귀하려면 왼쪽하산길을 택해 5km정도를 내려가야한다.

하산길 산 중턱 곳곳에서 자연석으로 쌓은 숯가마터를 만날 수 있다. 60∼70년대 산촌 주민들의 삶은 지난했다. 산에서 벌목한 나무를 옮기지 않고 현장에서 숯가마를 만들고 숯을 구워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대략 봐서도 서너개의 가마터가 있었는데 전체적으로는 적지 않은 숯가마가 있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주변에는 아직도 새카만 숯이 널려 있다. 둥치 작은 자잘한 나무가 많았던 이유가 이 때문일까. 하산 길은 생각보다 길다. 중간에 길이 30여m가 넘는 암반 위로 흐르는 청정수와 나무의 조화는 태고의 것인냥 깨끗함을 제공한다.

출발 4시간 50분 만에 사평마을이 나오고 찻길과 함께 나 있는 지장골을 따라 내려가면 용추사와 용추폭포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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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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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사터 일주문

▲장수사터, 용추사, 일주문에 대해 헷갈려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같다.

장수사는 신라 소지왕 9년(487년) 각연이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 이후 숙종 6년(1680년) 11월 소실돼 이듬해 재건했다. 당시 해인사에 버금갈 정도로 덕유산 일대에 많은 말사를 갖고 있었다. 한국전쟁 때 일주문만 남기고 또 소실됐다. 그래서 장수사터는 폐사지다. 지금의 용추사는 당시 부속 암자였던 용추암이 리네임했다.

장수사터에 홀로 남은 일주문은 ‘덕유산 장수사 조계문’이라는 편액을 달고 서 있다. 속세를 떠나 부처의 세계로 들어가는 첫 관문으로 한결같은 마음으로 수도하고 교화하라는 의미가 있다. 1702년 숙종 28년에 건립했다. 전쟁 때도 살아남았는데 1953년 안의면 당본리 봉황대로 옮겼다가 다시 1959년 본래자리로 옮겨 1975년 보수공사를 했다.

색이 바랜 것은 세월의 흔적. 공포의 장식이 공작 깃털처럼 화려하고 아름다워 일주문 중 최고로 친다.

특히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이 기물이다. 고목을 깎아내지 않고 자연무늬를 살려 안정감을 줄뿐 아니라 고풍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폐사된 절을 홀연히 지키고 있는 일주문은 쓸쓸하다. 오래 전 화려했던 장수사의 영화를 대변할 뿐 공허하다. 차창 밖으로 함양 물레방아가 스친다.
20130721기백산 (116)
용추폭포
20130721기백산 (70)
누룩덤
20130721기백산 (101)
기백산등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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