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사년 진주성 전투의 의미
계사년 진주성 전투의 의미
  • 경남일보
  • 승인 2013.08.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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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룡 (경상대 강사)
1593년 6월 29일(음력) 진주성이 함락된다. 10만 대 6000의 싸움이었으니 처음부터 패전하지 않을 수 없었던 전쟁이라고도 한다. 패전의 대가는 엄청났다. 김천일 황진 최경회 삼장수를 비롯 거의 모든 병사가 전투 중에 죽거나 함락 후 남강에 투신했으며, 군·관·민 합쳐 6만여명이 희생됐다고 한다. 계사년 진주성 전투는 왜적이 부산으로 철수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토요토미가 선택한 마지막 계책이었다. 일본군은 철수 도중에 명군과 조선군은 공격이나 추격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내세웠다. 이런 강화조약은 명군과 조선군이 일본군의 속임수에 놀아나 진주성 함락을 수수방관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일본군의 계책은 후퇴하는 척하면서 경상도에 그들의 진지를 구축하고 영호남의 중간지점에 있는 진주성을 공략해 호남으로의 진격 거점을 확보, 호남의 곡창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일본군은 퇴각하는 10만여 병력을 모조리 투입해 진주성을 공격했다. 지난해 임진년 10월 5일부터 10일까지 6일간에 걸쳐 3만여 명의 병력으로 총공세를 폈지만 함락시키지 못해 이로 인해서 호남으로 진격하려던 길목을 차단당해 결정적 손실을 입게 된 것을 만회하고자 한 것이었다.

비록 진주성은 함락됐지만 일본군에게도 진주성 전투에서 1만여 명이 죽어 병력손실과 전의를 상실하고 일본으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계사년 전투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논개제, 쌍가락지 날(?), 계사순의위령제 등으로 그날을 기려 한 여인의 한으로 패전에 대한 슬픔을 위로받고자 하는 것은 진주성 전투에 참가한 6만 군·관·민에 대한 모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처음부터 죽기를 각오하고 오직 왜군을 물리치고자 태풍 앞의 등불처럼 산화했다. 그들의 죽음은 임진왜란 후반부를 결정적으로 마무리 짓고 왜군 철수를 앞당기게 하는 역할을 한 우국열사이며 영웅들이다. 더 이상 진주성 전투의 의미를 과소평가하거나 왜곡해서는 안되겠다.

진주성 전투에서 많이 거론되는 인물이 논개인데, 혹자는 논개를 진주의 상징으로 생각하는데 이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논개는 진주성 전투 패전 후 10일이 지난 음력 7월 7일에 촉석루에서 벌어진 승전기념 행사에서 왜장과 함께 죽었다고 한다. 논개의 자결이 진주성 전투의 대표적인 테마로 거론되는 것은 계사년 진주성 전투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 전투에서 논개 이외도 수많은 여인들이 전투에 협조했다. 진주성 함락과 함께 당한 여인들의 수난은 엄청나고 처참했다. 많은 여인들이 남강에 투신했으며 간신히 살아남아 절개를 지키며 저항하다가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여인들이 수없이 많다. 진주성 함락 직후 간행된 ‘동국신속 3강행실도’에는 열녀가 무려 356명이나 올려져 있어 이는 효자 67명, 충신 11명과 비교해 많은 숫자다. 일본군은 여인들을 겁탈한 후 코와 귀를 자르고, 품에 안고 있던 아이를 먼저 죽이고는 유방을 잘라내는 등 천인공노할 만행을 자행했다.

진주성 임진년, 계사년 전투는 임진왜란에 큰 영향을 끼쳤다. 임진년 전투는 김시민 장군 지휘로 승전해 왜군이 전라도 곡창지역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진주성 군·관·민이 보여준 저항으로 일본군은 전쟁을 완전히 포기하고 철수를 앞당기게 됐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논개만을 부각시켜 패전의 전투로만 각인되는 것은 일부의 정황을 근거로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어떤 단체는 5월 중순에 물축제라는 행사와 더불어 논개제를 개최하고 있는 데 이 시기는 논개가 투신한 8월의 진주성 전투와는 많은 시간적 차이가 있다. 진주시와 뜻있는 시민들은 계사년 진주성 전투와 함락을 다시 재고해 행사의 시기와 명칭을 논의, 그에 알맞은 행사를 치러야 되겠다.

진주에는 개천예술제와 유등축제를 통해서 진주성 대첩과 진주성 함락을 다뤄 왔는데 몇 년 전부터 진주대첩이란 행사를 개최, 그 전투의 의미를 재고해 진주의 혼을 깨우고 있는 것은 참으로 만시지탄이며 진주의 큰 축제로 자리매김해야겠다. 세계적으로 알려지고 있는 유등축제도 진주성 전투에서 유래됐으니 시기적으로 1달여의 차이가 있지만 진주성 전투의 승전의 의미와 결과를 안다면 각 행사에 대한 조정과 시민들의 지혜와 협조가 필요하리라 본다.

사진 사본 - 손병룡

손병룡 (경상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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