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응상 연재소설> 유등의 꿈(48)
<박응상 연재소설> 유등의 꿈(48)
  • 경남일보
  • 승인 2013.10.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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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지에게 이야기해 줄게 많으니 용기가 생기고, 전화를 할 수 있는 명확한 명분도 있었다.

“오랜만이네.”약간의 서울 말투가 섞인 민지의 목소리가 다소 낯설었다.

“잘 지내?”

안부를 묻던 준호는 왠지 거리감이 있다는 생각에 서글펐다. 매일같이 통화하고 수시로 만나던 옛날에는 곧 바로 본론을 이야기하면 통했는데 절차가 복잡해졌다.

“먹고 살기 바빠서 연락도 못했네.”

몇 마디 인사치레를 하는 동안 옛날 민지의 목소리로 돌아오는 듯 싶은 순간 전화기 너머에 큰소리로 민지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민지는 조용히 말을 했다.

“지금 바쁘거든. 미안한데 조금 있다 통화하면 안 되…?”

낯선 만큼 설레는 준호는 다급해져 본론을 이야기했다.

“유등축제 때 올 거지?”

“연말까지 꼼짝 못해. 등축제 때문에 정신없어. 니 전화 받을 틈도 없어.”

S엔터테이먼트의 등 축제 총괄 책임자가 된 민지는 보안상의 문제로 등 축제 끝날 때까지 금족령이 내려져 있었다.

“유등 좋아하는 널 위해 이벤트도 준비했는데, 팍팍한 서울생활 잊을 겸 와.”

바쁘다는 사람에게 보고 싶다는 말을 할 분위기도 아닌 듯 했지만, 너무 오랜만이라 낯설고 설레기만 해 함부로 말하지 못하게 된 게 안타까웠다.

“이번 프로젝트는 꼭 성공시켜야 해, 미안하지만 나에게 절호의 기회야.”

성공을 눈앞에 둔 민지의 목소리는 감히 거역할 수 없는 힘을 뿜어냈다. 하지만 꿈과 사랑을 위해 봄부터 준비한 미련이 솟구쳤다.

“유등 예술가라면 남강 유등은 반드시 보고 배워야지.”

“초대는 고마운데, 그런데 등은 서울에서도 볼 수 있는데…”

민지의 목소리가 멀어지는 듯해 은근히 두려움이 엄습했다. 다급해진 준호는 남강 유등의 명성으로 밀어 붙였다.

“남강 유등이 최고잖아. 유등하면 진주잖아.”

“유등이 그게 그거지 뭐. 서울 등도 많이 발전해서 남강 유등과 비슷해졌어. 네가 서울 와, 구경시켜 줄 테니.”

“그것들하고는 차원이 달라.”

준호의 목소리가 거칠고 높아졌다. 하지만 민지는 차분했다.

“남강이 바다로 변하기라도 했어. 특별한 게 없잖아. 여러 해 동안 봤던 것들이고, 대학생 때 참여해봐서 훤히 알고 있어. 다른 축제도 많이 봤는데, 전부 다 비슷해.”

“이번엔 달라…”

준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고민해 보자. 어디서 만날지는. 유등이 더 멋진 곳에서 만나기로 하고 이만 바빠서 미안해. 사장님 호출이야, 또 전화해.”

민지가 서울 간 뒤로 단 한 번도 말해보지 못한 “사랑해” 한마디가 가슴속 깊숙한 곳에서 솟구쳐 오른 준호의 입술이 떨렸지만 이미 전화는 끓어졌다. 잠시 멍하게 있던 준호는 미워하지 못하고 민지를 이해하는 쪽으로 변하고 있는 자신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그래, 멋 떨어지게 출세해서 잘 먹고 잘 살아야지, 성공해야 사람 취급하니까.”

사랑 앞에 맥을 추지 못하는 자신의 속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고, ‘그녀와 함께 축제를’ 준비한 준호의 소망은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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