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진 교수의 건강이야기
이소진 교수의 건강이야기
  • 경남일보
  • 승인 2013.11.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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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마다 도둑을 잡아요”
몇 해 전 수면 클리닉에서 일할 때였다. 얌전하게 생긴 자그마한 할머니가 며느리와 함께 진료실로 들어오셨다. 어떻게 오셨는지 묻자 할머니는 쭈뼛거리시고 며느리가 대신 이야기해 주었다.

“아니, 저희 어머니가 낮에는 괜찮으신데, 밤만 되면 주무시다가 누구를 때리듯 막 손발을 휘두르세요. 벌써 몇 년이나 그러셨다는데 저희가 이번 추석에 내려갔다가 직접 봤거든요. 깜짝 놀라서 모셔왔어요.” 할머니께 다시 여쭤 보았더니, “내가 잠은 참 잘 자는데 밤에 꼭 도둑 꿈을 꿔요. 도둑이 쫓아와서 잡으려다가 깨어 보면 이불이 옆으로 가 있고 그러네요”고 하셨다. 머리에 큰 문제가 생겨서 그렇지 않을까 걱정하시는 두 분을 안심시키고, 몇 가지 더 여쭤본 뒤 검사를 예약해 드렸다. 얼마 뒤 할머니는 수면센터에서 여러 감지기를 몸에 붙이고 주무시며 야간수면다원검사를 받으셨다. 결과를 판독해 보니, 다른 사람이라면 근육이 풀려 움직이지 못하는 렘수면에서 할머니는 주먹과 다리를 필사적으로 움직이시며 격렬하게 ‘도둑을 잡고’ 계셨다.

이렇듯 꿈을 행동으로 한다며 수면 클리닉을 방문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 야간수면다원검사에서 렘수면 동안 턱과 다리 근육의 긴장도가 높아져 있고, 검사 시 꿈을 행동으로 옮기는 모습이 보이거나 그러한 보고가 있는 경우, 그리고 렘수면 동안 간질형 뇌파 활동이 없어야 하고 다른 수면 장애, 내과적 또는 신경과적 질환, 정신 장애, 약물 사용이나 물질사용장애로 증상이 더 잘 설명되지 않는 경우 렘수면 행동 장애로 진단을 내릴 수 있다. 예전에는 일반 인구의 0.38%, 노인 인구의 0.5%가 이 병에 걸릴 가능성이 있다고 했으나, 올해 8월에 국내의 한 대학병원에서 발표한 자료를 보면, 60세 이상 348명에게 야간수면다원검사를 시행했을 때, 렘수면 행동 장애로 진단된 사람이 7명으로 유병률이 약 2%였다. 수면센터에 방문해서 어떠한 이유로든 야간수면다원검사를 시행 받은 분 중에서는 더 많은 사람이 렘수면 행동 장애로 진단된다. 필자가 근무했던 수면 센터에서도 검사받은 환자의 약 5%가 렘수면 행동장애로 진단을 받았다. 상황이 이러하니 실제로 진단받지 않고 그냥 지내고 있는 분들도 많을 것도 같다.

렘수면 행동 장애는 남자들이 더 많이 걸리고 대개 50세 이후에 나타나지만 어떤 나이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파킨슨병, 루이소체 치매, 기면병, 뇌졸중과 같은 신경과 질환이 있거나 몇 가지 특정 약물을 복용하는 경우에서 많이 나타난다. 이 병이 있는 분들은 렘수면 동안 근육이 풀리지 않아 꿈을 행동으로 옮기게 된다. 할머니처럼 ‘도둑을 잡다가’ 벽을 쳐서 다치거나, 배우자를 때리거나, 심지어는 ‘전쟁터에서 뛰어다니다가’ 침대에서 뛰어내려 팔이 부러진 분도 봤다. 몽유병과는 달라서 일어나서 걸으며 멀리까지 가거나 복잡한 행동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보통은 잠들고 난 뒤 90분 뒤부터 행동이 나오고 하룻밤에 네 번까지도 경험할 수 있다.

렘수면 행동장애는 약물 때문에 갑자기 생긴 경우가 아니라면, 만성적으로 진행하는 질환이며 자연스럽게 좋아지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꿈의 내용에 따라서 자신과 같이 자는 사람의 안전에 상당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매일 밤 꿈을 행동으로 옮긴다는 한 할아버지는 위험한 물건을 모두 치워둔 휑한 거실에서 가죽끈으로 몸을 묶고 주무신다고 했다. 그렇지만 이런 분들도 수면 클리닉에서 잘 진단받고 치료를 시작하게 되면 90% 이상 증상이 좋아질 수 있다. 진단을 위해서 반드시 야간수면다원검사를 받아야 하고, 코골이나 무호흡, 주기성 사지운동증과 같은 다른 수면 장애가 있다면 따로 치료가 필요하다. 약을 먹으면 꿈꾸는 잠, 즉 렘수면에서 근육이 풀리기 때문에 꿈을 행동으로 하는 것이 줄어든다. 때로 약을 먹어도 행동을 하는 날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침실의 환경을 안전하게 정리해야 한다. 깨질 수 있는 물건이나 부딪혀서 다칠 수 있는 물건은 모두 미리 치워놓아야 하고, 침대를 사용한다면 아래와 둘레에 푹신한 쿠션을 두어야 한다. 혹시 모르니 1층 이상에 사는 경우는 창문을 잠그고 자는 것이 좋다. 번지 점프를 하는 꿈을 꾸며 창문을 열고 나가려 하게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꿈의 내용에 따라 전혀 예상치 못한 위험한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갑자기 약을 줄이거나 끊어서는 안 된다.

환자분들이 종종 약을 먹으면 이 병이 낫느냐고 물어오신다. 물론 고혈압이나 당뇨처럼 약을 먹는 동안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지 병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증상을 조절하여 꿈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것이 자신과 배우자의 안전을 위해 매우 중요하므로 꼭 잘 진단 받고 치료를 받아야 한다. 요즘은 렘수면 행동 장애가 파킨슨과 같은 다른 심각한 신경과적 질환의 전구 증상이 아닐까 하는 예측도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으므로 진단과 치료뿐 아니라 경과를 세심하게 관찰하는 것도 중요하다.

/경상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렘수면행동장애
렘수면행동장애
NP이소진3
이소진 경상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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