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의 역학이야기> 가을
<이준의 역학이야기> 가을
  • 경남일보
  • 승인 2013.11.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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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살지기(肅殺之氣)
세월은 흐르는 물이라더니 어느새 가을 짙어 아침저녁은 한겨울마냥 싸늘하다. 한여름 풍성하였던 기운들은 어느새 단풍이 들어 울긋불긋 온통 아름답다. 서늘한 냉기가 추상(秋霜) 같다는 말도 실감이 난다.

TV를 틀고 신문만 펼치면 온통 서민들의 삶과는 멀리 동떨어진 하품 나는 말들뿐이다. 대선타령, 국정원, 댓글, NLL, 검찰인사…. 국민들은 하루하루 먹고살기 빠듯하고, 오로지 생계가 걱정스러운데 정치권은 마치 무슨 신선 노름하듯 뜬구름 잡는 풍월만 읊조리고 있다. 무슨 원한에 사무친 귀신마냥 생전에 익숙한 빗자루 몽둥이를 부여잡고 꺼이꺼이 통곡하는 것 같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제 지겹고 식상해 한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필자 역시 보수파의 프레임에 갇혀 사실과 현상을 구별 못하는 청맹과니(靑盲―)에 불과한 사람이라 지탄 받을지도 모른다. 물론 70년대 군역을 필한 50대 후반 경상도 남자로서 그렇게 살아온 삶의 여정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이 그런 프레임에 저절로 함몰되어 있는 고질적인 꼰대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먹어야 구경을 하든 말든 할 것인데, 정치권은 하세월 배부른 농지거리만 하고 앉아 있으니 속 불이 터져서 하는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정치적 논쟁들의 종착역은 사법부이다. 검사의 기소와 판사의 법적 해석에 던진다. 판사는 그야말로 가을 서리같이 맑고 투명하고 또 모든 이들의 갈증을 해소하여 줄 명쾌한 판단을 하여야 한다. 온갖 부풀린 의혹을 한 점 더러움 없이 깔끔하고 깨끗하게 떨쳐버리고, 푸르디푸른 가을 하늘처럼 해맑아야 한다. 그리고 무성하였던 여름철의 잎들일랑 이제 울긋불긋 아름다운 단풍으로 곱게 물들도록 해야 한다. 그 모든 있을 수 있는 사람들의 생각과 의혹과 말들 역시 누구를 단죄하거나 왕따 시키는 것이 아니라 모두 있을 수 있는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켜 국민 통합을 이루어 나가도록 해야 한다. 온갖 위대하였던 사상과 말들과 봄날 여름철의 무성한 이야기는 그저 전설로 남겨 두어야 한다.

릴케의 가을날에 나오는 시어처럼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지을 필요가 없다. 하물며 철지난 사상과 이념타령에 언제까지나 빠져 있을 것인가. 청아한 가을엔 누구나 풍요로운 가을철 열매곡식들을 마음껏 배불리 먹고, 잘 익은 신주(神酒)에 불콰하게 흥이나 덩실덩실 춤추며, 하늘에 감사의 제전을 올려야 한다. 가을 정국은 그런 밝음과 풍요로움이 되어야 한다. 법원의 추상같은 판결은 냉혹한 단죄가 아니라 풍요로운 공동체를 다지는 초석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숙살지기(肅殺之氣)이다. 이것이 우리 민족이 수행하여야 할 인류사적 사명이다. 금화교역(金火交易)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

옛 사람들의 세월에 대한 혜안은 12지에도 고스란히 스며 있다. 가을은 신유술(申酉戌)월이고, 사유축(巳酉丑)의 큰 배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가을의 시작인 신금(申金)안에는 기(己, 戊) 임(壬) 경(庚)의 순서대로 세월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기(己, 戊)는 지난 여름 미토(未土)속의 무토(戊土)가 경금(庚金)의 힘을 받아 축소 응결되어 가을을 시작하는 기토(己土)로 가을을 이끌어 낸다. 임(壬)은 다음 세월 겨울의 핵심인 임수(壬水)를 잉태시켜 다음 세월을 준비한다. 경(庚)은 바야흐로 자기 세월의 자리를 잡아 가을 세월을 주도해 나간다.

하지만 가을이지만 아직 차갑지는 않고 더운 기운이 더러 남아 있다. 유금(酉金)은 가을 기운이 강렬하고 확실하게 발현되는 자기 세월이다. 경금(庚金)이 숙살지기를 내세우며 가을로 향한다. 차갑고 냉정한 가을이 열매로 익는다. 열매 안의 신금(辛金)은 차갑고 딱딱하고 냉정한 씨앗으로 영근다. 야물고 단단하다. 가을은 분명하다. 그리고 결실의 계절이다. 술토(戌土)는 가을의 마무리다. 가을의 마지막 기운인 신금(辛金)은 서서히 자기소임을 다하여 사라지려 한다. 이미 지나버린 여름철 오랜 세월의 흔적인 정화(丁火)도 따스하게 마무리된다.

마지막 열정마냥 정화는 봄(寅)과 여름(午)의 청춘을 만나면(그것이 실제 사람이건, 일과 사업이든, 활동이든, 학문과 사상이든, 寅午戌의 火局)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판 파우스트 박사처럼 인생의 마지막 불꽃을 활활 불태워 버린다. 재조차 남기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 대지(己, 戊)가 가을의 세월을 확실하게 마무리하여 감추면서 하나의 세월을 끝낸다. 그대 가을의 정열을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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