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민 연재소설] 진주성 비차(129회)
[김동민 연재소설] 진주성 비차(129회)
  • 경남일보
  • 승인 2014.05.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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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2. 말티고개 나막신쟁이
“세상 새들이 날기를 그만두지 않는 한 아드님도…….”

“운명인지라…….”

보묵 스님 말에 그렇게 응하는 술명은, 남강 하류 뒤벼리 쪽에 있는, 이전부터 돼지를 많이 키운다고 해서‘돝골(猪洞, 저동)’이라고 이름 붙여진 곳으로 가는 도중이었다. 그러다가 마침 그 고을 공동묘지가 있는 선학산 쪽에서 내려오는 보묵 스님과 우연히 마주쳤던 것이다. 왜군들과 조선군들 시체가 쌓여간다는 끔찍한 소문이 들려올 때마다 어김없이 떠오르곤 하는 공동묘지였다.

“아, 보묵 스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지인이 죽었어요. 그래 부처님께 잘 이끌어 주십사고 기도를 드리고 오는 길이지요.”

그 말끝에 보묵 스님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왜놈들 횡포가 심하다니 부디 몸조심들 하십시오.”

가랑잎 굴러가는 듯한 그 음성은 여전했다.

“고맙습니다. 인간의 기본도 모르는 것들이니 스님께서도…….”

좌우를 둘러보며 보묵 스님이 또 한 번 굳은 목소리로,

“아드님이 어서 그 일을 이루어내야 할 터인데…….”

“그러잖아도 큰 걱정입니다. 스님께서 오래 전에 예언하신 대로 나라가 위기에 빠지고 말았는데, 나라를 건질 귀인을 구할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 제 자식놈이, 아직도 하늘이 내리신 소명을 해내지 못하고 있으니…….”

언제 그곳에도 왜군이 들어올지 모르는 그런 판국인데도 낮술에 취한 이들이 큰소리를 지르며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너무 서두르지 마십시오. 보묵 스님은 조금 전 자기가 내려온 말티고개 쪽을 올려다보았다. 소장수나 말장수가 소나 말을 팔고 가다가 쉬어가기도 하는 커다란 정자나무가 서 있고, 큰 고개 곳곳에는 술꾼들을 유혹하는 주막들이 즐비하였다. 보묵 스님 시선을 좇아가던 술명의 머릿속에 문득 불쌍하게 죽은 나막신쟁이 이야기가 자리 잡았다.

그 고장에만 있는 날, 나막신쟁이날(나막신장이의 날). 섣달 스무 이튿날, 한 해의 마지막 장날. 소설, 대설, 소한, 대한, 다 지났는데도 항상 모질게도 춥기만 한 날이다. 거기 말티고개 언덕바지에 살던 착한 나막신쟁이를 죽게 한 것은 가난이었다.

그날도 진주 장터에 나막신을 팔러 나갔다가 돈도 벌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오다가, 진주성 안에 사는 어떤 부자가 죄를 지어 관가에서 곤장을 맞아야 하는데 돈을 받고 자기 대신 맞아줄 사람을 구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리하여 부자를 찾아가 돈 석 냥을 받은 나막신쟁이는 곤장 서른 대를 맞아 혼절,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 집으로 갈 거라고 말티고개를 넘어오다가 쓰러지고 말았고, 다음 날 가족들에 의해 언 손에 돈 석 냥을 쥔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가 죽은 후로 그날만 되면 이상하게 모진 바람이 불고 날씨가 추웠으며, 진주 사람들은 그날을 나막신쟁이날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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