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민 연재소설] 진주성 비차(138회)
[김동민 연재소설] 진주성 비차(138회)
  • 경남일보
  • 승인 2014.06.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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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1. 비밀의 산행

조운은 이른 새벽부터 명석이라는 고을로 가는 길목에 서 있었다. 길 옆 이슬 촉촉히 내린 풀숲에서 새날을 쪼아대는 새소리가 흘러나왔다.

상돌과 거기서 만나기로 약속이 돼 있었다. 상돌을 기다리는 동안 조운은 내내 그의 생각을 하였다. 상돌의 부모가 그렇게 세상을 일찍 떴다는 사실은 미처 몰랐다. 조운은 또 한 번 상돌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그가 조선에서 가장 천한 신분인 백정이라는 사실에서 그랬고, 지금은 혈혈단신이라는 사실에서 그랬다.

길가 나무들은 잎이 별로 달려 있지 않았지만 의연한 모습이었다. 새봄이 오면 또다시 새순이 돋고 여름이면 짙푸르게 무성한 녹음을 지울 수 있다는 희망에 차 있는 듯했다. 간혹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하늘로 솟은 고개는 꼿꼿했다. 조운은 그 나무들을 보며 스스로도 용기를 잃지 않으려는 마음을 다졌다.

“아, 오래 기다리셨지요, 형님?”

등 뒤에서 들려온 그 소리에 조운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의 눈은 상돌보다도 상돌 뒤쪽에 숨듯이 서 있는 웬 처녀에게로 더 쏠렸다.

“인사드리시오. 내가 늘 이야기하던…….”

그 처녀도 그렇지만 서른 중턱을 넘긴 상돌도 사뭇 부끄러워하는 빛이었다. 그들이 서로에게 가지는 감정결의 두께가 어느 정도인가를 잘 증명해 보이는 모습들이었다. 그 백정 처녀에 대한 조운의 첫인상은, 그녀가 결코 천박해 보이지 않고 퍽 어질게 생겼다는 것이었다. 구원을 요청하듯 상돌만 보고 있던 백정 처녀는 고개를 깊숙이 숙여 인사를 하였다. 피부는 검고 야윈 몸매였지만 갸름한 얼굴이 예쁘고 빨갛게 물든 귓불이 탐스러웠다. 얼핏 둘님과 광녀의 중간쯤에 서 있는 여자 같다는 느낌이 전해졌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네요.”

조운도 가볍게 허리를 굽혀 보였다. 양반들은 물론이고 일반 평민들도 백정에게는 하대(下待)하는 경향이 있던 당시였다. 그렇지만 상돌이 데리고 온 여자라는 생각에 조운의 입에서는 절로 높임말이 나왔다. 상돌이 서두르는 모습을 보였다. 조운도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충청도보다는 가깝지만 이제부터 꽤 먼 길을 떠나야 하는 것이다.

조운과 상돌이 앞장서서 나란히 걷고, 백정 처녀는 약간 뒤에서 따라왔다. 조운은 그 처녀가 여자의 몸으로 남자들 걸음을 따라올 수 있을까 은근히 걱정을 했었는데, 얼마 가지 않아 그 우려가 한갓 기우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녀는 오히려 조운 자신보다도 더 잘 걸었던 것이다. 천한 신분으로 험한 일을 하며 살아오다 보니 저절로 몸이 단련된 것 같았다. 그러자 저런 처녀를 아내로 맞아들이려는 상돌이 잘됐구나 싶었다. 어렵고 힘든 세상을 살아가자면 남자에게도 튼튼한 내조가 필요할 것이 아니겠는가.

둘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나타나 보이는 광녀의 얼굴. 조운은 가늠해 보았다. 그가 절망과 실의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마다 자신에게 더 큰 용기와 힘을 주는 여자가 어느 쪽인가를. 그런데 실로 역설적이게도 광녀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노래, 비차의 노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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