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목의 혼을 바라보며
초목의 혼을 바라보며
  • 경남일보
  • 승인 2014.10.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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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이석기의 월요단상>
무궁히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 위에 그토록 욕망을 자극하던 지난여름도 이제는 모든 것이 영글고, 심지어 바람소리 강물소리 조차 또렷이 영글어 한층 가까이 선명하게 깊어가는 계절이 아닌가. 맨몸으로 받아내던 뙤약볕의 열기 속에 느낄 수 없었던 바람이 가슴갈피에 서늘히 와 닿는 까닭도 시간의 흐름 때문일까? 여름잠 깊었던 이성과 사색도 잠을 깨어 새로운 혼으로 태어났고, 푸름의 무게로 내려앉은 저 무성한 수풀도 시간에서 세월로 이름이 바뀌는 까닭을 아는 듯 고개를 떨어뜨릴 수밖에.

지난여름 불타는 뙤약볕을 이고 걷던 우리의 발걸음이 이 가을날 한가로워질 수 있는 것도 어쩌면 시간이 세월로 이름 바뀌는 계절의 탓일 줄이야. 그래서인지 우리에게도 더 이상 뜨겁게 입을 열어 불을 토해 내듯 많은 말이 필요 없고, 이제는 더 이상 여름 날씨처럼 먹장구름 가슴 쳐 아파 우는 천둥과 번개에 숨 가빠지고, 거센 소낙비 울음을 울어야 한다고는 믿진 않을 것이다.

저 푸르른 녹음의 야망도 두 눈 내리깔고 목 고개 수그리며 바뀌는 제 이름 불러주길 기다리는 듯. 아니 저 여름 수풀도 결국 시간 앞에, 세월 앞에 옷을 갈아입고는 붉은 단풍빛깔 울음 삼켜 물고, 서리치는 가을밤을 깨어 새워야 한다는 이치를 깨닫게 되느니. 모름지기 삶이란 결국 제 코스를 따라가야 한다는 것 아니던가. 계절의 순서처럼 인생에서도 사랑에서도 더욱 제 순서를 따라가야 한다는 이치를 그 누구의 가르침이 없어도 단 며칠 밤을 깨어 새우다 보면 스스로 알게 되리라.

무릎이 시린 영혼의 방랑 끝에 감성과 이성의 곤두박질을 거듭하고 나서 떠날 이들 떠난다 해도, 남아 있을 이도 있다는 사실에 고마워하자. 지금껏 무심코 지나다녔던 진주성 숲속에 거기 보금자리 틀어 제 둥지를 만든 새들이 해마다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자. 그래서 진주는 아름다운 곳이며, 사는 동안 좋은 일이 지속 되도록 자신의 장단점도 발견하여, 계절의 변화에 성찰의 시간도 가져보고 고할 것은 고해 보자.

우정 같은 사랑도, 사랑 같은 우정도 이별로 이름이 바뀌면서 고할 것에 이별을 고하는 깨끗한 손들. 서로의 마음이듯 이대로의 모양이듯, 쓸쓸히 웃으며 우리도 허황스러운 꿈에도 이별을 고하자. 뜻 없는 허세와 피곤한 자존심에 이별을 고하고, 어스름 추억이라는 보석과 재산이 되어가는 이치에도 감사하자. 저토록 아름다운 영혼의 집을 남겨놓고 언젠가는 떠나가야 할 오묘한 초목의 혼을 바라보며, 우리 모두 남강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맑고 맑은 강물로 풀리어 흐르는 영혼의 성숙에 다다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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