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환 변호사의 법률이야기
노경환 변호사의 법률이야기
  • 경남일보
  • 승인 2014.10.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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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판결(明判決)
의뢰인들로부터 ‘판결문이 너무 어려운 말로 되어 있어 도무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하소연을 많이 듣는다.

몇 해 전 한글날 특집 TV 프로그램에서 서울대 국문학과 대학원생들에게 여러 소송사건의 판결문을 주고 의미를 해석하게 하였는데, 재판의 결론 즉 원고가 승소했는지 패소했는지는 대략 맞추었으나, 대부분 ‘판결문의 내용을 정확히 해석하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 최고대학의 학부생들이 그럴진대….

이와 관련하여 필자가 경험한 재밌는 일화가 있다. 민법 제108조(통정한 허위의 의사표시) 제1항은 ‘상대방과 통정한 허위의 의사표시는 무효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실제는 법률행위(계약)가 없는데, 법률행위가 있었던 것처럼 형식적인 외관만 갖춘 경우 그 계약은 무효로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빚을 진 채무자가 자신의 부동산에 대하여 채권자가 강제집행을 들어올 것을 염려하여 실제 매매를 하지 않았지만 매매를 한 것처럼 가장하여 매매를 원인으로 하여 제3자에게 소유권이전등기를 경료한 경우에 그 등기는 무효로 한다는 것이다(실제 매매가 없었는데, 매매가 있는 것처럼 가장했으므로). 그런데 빚을 지고 있던 할아버지가 며느리 앞으로 매매를 원인으로 소유권이전등기를 경료하자 채권자가 위 할아버지와 며느리를 상대로 위 매매가 통정허위표시(通情虛僞表示)이므로 무효라고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하였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원고로부터 온 소장을 받아들고 ‘내가 할 일이 없어 며느리와 통정을 했겠느냐?“며 노발대발하며 원고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고 필자를 찾아오신 적이 있다. 할아버지는 ‘통정(通情)을 며느리와 간통(間通)을 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신 것이다. 필자는 박장대소를 했으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법률에 문외한이고, 한자 표현에 익숙한 할아버지의 입장에서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 보니 최근 법원에서도 쉽고 간결한 판결문 쓰기를 권장하여 일반인이 보다 쉽게 판결문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과연 명판결(明判決)이란 무엇일까?

일단 재판의 결론이 당사자가 수긍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패소한 당사자라도 어떤 이유로 자신이 패소했는지 알고 충분히 공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재판이 공정하고 올바른 소송절차에 따라 진행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당사자들이 패소판결에 대해 공감하지 못하는 경우는 재판의 결론 그 자체보다는 재판장이 재판과정에서 자신의 주장을 충분히 들어주지 않았거나 다른 상대방의 말만 편파적으로 들어주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다음으로, 딱딱한 법률용어의 나열이 아니라 따뜻한 인간미도 느낄 수 있는 판결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칼처럼 차가운 이성이 번득이되 햇살처럼 따스한 인간미를 가진 판결! 말은 쉽지만 법관 수는 적고, 처리해야 하는 사건은 많은 기형적인 우리의 사법구조상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이와 관련하여 인상 깊게 읽었던 미국판결 하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930년대 초 대공황 시기에 뉴욕시 치안판사였던 ‘피오렐로 라과디아(Fiorello La Guardia)’는 배가 고파 빵을 훔친 노인 사건을 맡아 그 노인에게 10달러 벌금형을 선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배고픈 사람이 거리를 헤매고 있는데 나는 그동안 너무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었습니다. 이 도시 시민 모두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 자신에게 1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하며, 방청객 모두에게 각각 50센트의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방청객들은 순순히 벌금을 냈고, 라과디아는 이렇게 걷은 57달러 50센트를 노인에게 주었으며, 그 노인은 10달러 벌금을 낸 후 47달러 50센트를 갖고 법정을 떠났다(조국 교수의 ‘왜 나는 법을 공부하는가’에서 재인용). 이 얼마나 이성적이면서도 따뜻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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