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칼럼]'독자놈들 길들이기'
[경일칼럼]'독자놈들 길들이기'
  • 경남일보
  • 승인 2015.02.03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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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청 (시인·진주제일여고 교사)
최근 야수의 피를 지닌 한 시인이 영면했다. 박남철 시인이다. 박남철은 이성복, 황지우와 함께 80년대 해체시의 선두주자로 평가되는 시인이다. 1980년대는 리얼리즘적 민중시가 유행하던 시대였다. 이런 시대에 그는 모든 금기에 도전하는 과감한 시를 보여주었다. 전통적 수사나 구조를 파괴함으로써 냉소, 분노 등을 여과 없이 표현했다. 해체를 통해 모든 억압에 저항하려는 문학적 시도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독자놈들 길들이기’라는 시는 시인과 독자의 전통적 관계를 부정하는 파격을 보여주었다. 한마디로 기본적인 불문율을 깨뜨린 하나의 사건이라 할 만하다.

제목부터 도발적이지만 “차렷, 열중쉬엇, 차렷”으로 끝나는 이 시는 시종일관 구시대적 독자들에 대한 훈계로 시작해서 훈계로 끝난다. 소비되기 위해서는 독자의 구미에 맞추든지, 아니면 자기를 알아주는 소수의 독자에 만족하든지 선택하면 될 것을 굳이 독자의 군기를 잡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상식이다. 그런데 그는 상식을 배반한다. 그가 아니라도 누군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당시 만연한 획일성에 대한 도전으로 윤리나 관습 이전의 본질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본의 시대에 익숙한 소비 습성을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 통속적 기준과 제도를 인정할 수 없었다. 도덕과 제도로 그럴듯하게 포장된 위선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추문에 개의치 않고 세상과 끝까지 불화하는 길을 택했다. 과거에도 종종 제도 속에 들어가는 게 싫어 은둔을 선택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그처럼 세상과 위악적으로 부딪히면서 냉소하고 풍자한 경우는 드물다. 어쩌면 그는 오로지 새로운 작품만 추구할 뿐 도덕, 권력 따위는 위선의 산물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일정한 문제의식에도 불구하고 그 지점에서 고착화됐다는 것이다. 80년대에 시작된 그의 부정과 파괴의 포즈는 2010년대 그가 죽을 때까지 변함이 없었다. 이성복과 황지우가 해체시에서 출발했지만 새로운 성찰을 에너지로 변모된 것과 대비된다. 그 자신 부정과 해체의 아이콘으로 화석화돼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시대적 삶과 의식을 꿰뚫지 못했다. 그의 자존감 이면에는 어쩌면 세상에 동화되고 싶은 욕망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는지 모른다. 다만 그의 자존감이 그의 아이콘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아방가르드는 그것이 아무리 새롭다 해도 결국은 전통의 일부로 수렴되고 마는 운명을 지녔다. 결국 길은 두 가지다. 허무주의로 빠지든지, 아니면 자신의 아이콘에 갇혀버린 자기 복제의 위악적인 포즈를 반복하는 것이다. 기성의 문법과 권위를 부정하고 파괴하는 해체가 스스로 새로운 변화에 이르지 못할 때의 한 단면을 그가 잘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결국 그도 비판받아 마땅한 하나의 관습이 된 셈이다. 노동시인 박노해와 마찬가지로 그의 역할은 이미 80년대에 끝났는지 모른다. 스스로 이것을 인정할 수 없었기에 아름다운 여백을 남기지 못한 것이 아닐까. 시인에게는 여백도 시인데 말이다.

 
하재청 (시인·진주제일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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