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식의 그림이야기] 자연과 풍경화
[김준식의 그림이야기] 자연과 풍경화
  • 경남일보
  • 승인 2015.04.0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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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화는 인류문명의 시작부터 존재해 온 오래된 회화의 한 양식이다. 풍경화(Landscape painting)란 말 그대로 자연경관을 화가의 느낌대로, 혹은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다. 비록 같은 장소일지라도 화가마다 묘사된 풍경은 달라지게 된다. 이것은 풍경을 해석하는 화가의 삶과 철학,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 그리고 화가가 사는 지역(예를 들면 동양과 서양)이 화가의 그림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가 그린 ‘Sommer Landschaft mit Liebespaar’(1807)


공허함이 느껴지는 풍경

여름 날, 하늘과 땅이 맞닿은 풍경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드넓은 평야와 한적한 시골 풍경은 이 그림을 그린 화가가 후반부 삶을 보낸 독일 남동부 드레스덴(Dresden)의 전형적인 풍경이다.

나무들은 푸르고 강물은 조용히 흐르며 낮은 언덕 위에는 키 큰 미루나무와 자작나무가 서 있고 좀 떨어진 곳에 낮은 나무 몇 그루가 모여 있다. 키 큰 나무 밑으로 붉은 장미와 노란 루드베키아, 탐스런 빨간 열매를 달고 있는 산딸기와 하얗게 빛나는 백합이 어우러져있다.

나무 사이에 흰 비둘기 두 마리가 사이 좋게 앉아 있는 그 밑으로 한 쌍의 남녀가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다. 두 남녀는 마치 금지된 사랑인양 짙은 나무 그늘에 몸을 가리고 키스하는 듯 얼굴이 겹쳐져 있다.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는 북 독일의 발트 해 연안 그라이프스발트에서 1774년 태어났다. 어린 시절 지리적으로 가까운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그림을 배운 뒤 20대 중반 독일 남동부 드레스덴에 정착하여 42세 되던 해 그곳의 미술학교 교수가 된다.

프리드리히의 아버지는 엄격한 루터파 신교도였고 어머니는 그가 일곱 살일 때 천연두에 걸려 죽었다. 그 이듬 해 큰 누이 엘리자베스가 죽고 작은 누이 마리아 또한 프리드리히가 17세 되던 해 발진티푸스에 걸려 죽는다. 그리고 그가 13세 되던 해 자신이 얼음물에 빠진 것을 구하려다가 그의 형이 익사한 사건을 겪으며 성장한 프리드리히의 그림에는 죽음에 대한 反映, 우울함과 공허함 그리고 짙은 종교적 이미지가 바닥에 깔려 있게 된다.

독일 낭만주의 회화를 대표하는 화가였던 프리드리히는 계절의 변화에 대한 내면의 풍경, 이를테면 가을 ·겨울 ·새벽 ·안개 ·월광 ·얼음과 눈 등의 정경을 독특한 그의 방식으로 표현하였는데 그 중심을 관통하는 느낌은 정적(靜寂)과 우울(憂鬱), 그리고 죽음과 공허(空虛)감이었다. 20세기초 노르웨이의 화가 에드바르드 뭉크(Edvard Munch)는 프리드리히의 이러한 경향에 매우 큰 영향을 받게 된다.

프리드리히에게 있어 인물묘사는 인물을 부각 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풍경 속에 혼재되어 있는 풍경의 일부분으로만 존재한다. 이 그림에서도 한 쌍의 연인(Liebespaar)이라는 표제를 붙였지만 사실 남녀의 묘사는 여름날의 풍경 속에 있을 법한 남녀 한 쌍, 마치 그림 속의 비둘기와 같이 특별한 이야기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림 속의 나열된 사물로서 배치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요셉 안톤 코흐의 ‘Der Schmadribachfall’(1822)


영웅적 풍경의 창조, 슈마드리바흐 폭포

프리드리히가 묘사한 자연 풍경은 화가의 내면이 외부의 풍경으로 묘사되는 것이라면 슈마드리바흐 폭포를 묘사한 코흐의 그림은 외부의 압도적 풍경을 그대로 묘사한 것으로서 화가의 내면은 외부의 풍경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즉, 프리드리히와 코흐의 풍경화는 재현(Mimesis)된 풍경의 주체와 객체가 뒤바뀐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요제프 안톤 코흐(Joseph Anton Koch. 1768~1839)는 1768년 오스트리아 티롤 지방의 엘비게날프(Elbigenalp)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그를 티롤의 화가라고 부른다. 코흐는 양치기로서의 삶을 살다가 그가 다니던 교회의 주교였던 Umgelder의 추천으로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미술학교 칼스슐레(Karlsschule)를 다니게 된다. 하지만 칼스슐레는 사관 학교와 같은 엄격한 규율의 학교였기 때문에 코흐는 그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학교에서 도망쳐 프랑스와 스위스를 여행하고는 마침내 로마에 도착한다.

이 시기에 코흐는 독일 신고전주의 작가인 카스텐스(Asmus Jacob Carstens)를 만나게 되면서 영웅적 회화와 접하게 되었는데 이 때의 영향은 코흐의 삶 전체와 그의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1800년이 되면서 코흐는 본격적인 풍경 화가로 발전하게 되는데 특별히 그는 ‘영웅적 풍경화’에 집중하게 되었다.

코흐가 이러한 ‘영웅적 풍경화’를 그리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812년 프랑스군의 이탈리아 침공(나폴레옹 군)으로 코흐는 로마를 떠나 1815년까지 고향에 머무르게 된다. 이 시기에 코흐는 지금까지의 역사화적 풍경화가 묘사했던 목가적이고 성서적 모티브의 비 현실적 풍경화로부터 자신의 고향인 티롤의 살아 움직이는 자연을 묘사하려 했다. 실제로 존재하고 우리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위대한 자연을 탈고전적인 풍경화로 묘사하면서 독자적인 ‘영웅적 풍경화’가 태어나게 된 것이다.

슈마드리바흐(Schmadribach) 폭포는 실제로 스위스 베른 주(州) 라우터 브루넨의 슈테첼베르크(Stechelberg)에 있는 폭포로서 라우터 브루넨 계곡에 있는 30여 개의 폭포 중 하나이다. 슈마드리천(川)에 의해 형성되는 말 꼬리 형(horse tail) 폭포로 총 높이는 300m, 막힘 없이 낙하하는 최대 높이는 250m이다. 슈마드리천 자체가 큰 빙하에서 발원하므로 1년 내내 많은 물이 쏟아져 내린다. 코흐는 이 장엄한 폭포를 몇 장의 그림으로 남겼는데 이 그림은 그 중 하나이다.

거대한 빙하로부터 녹아 나오는 엄청난 양의 물이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광경은 누구에게든 언제나 압도적인 풍경일 수밖에 없다. 동 서양을 막론하고 폭포의 엄청난 풍경과 거대한 소리는 많은 예술가들의 예술 혼을 자극하였다. 동양의 문학작품으로는 이태백이 지은 ‘망여산 폭포’ 가 유명하고 회화로는 우리나라 겸재 정선의 ‘박연 폭포’가 바로 자연경관, 특히 폭포에 대한 경배를 나타낸 그림으로 유명하다.

서양인 코흐의 폭포 그림은 매우 위압적이고 사실적인 폭포 그대로를 묘사하고 있는 반면 이백의 시나 박연의 그림은 비록 거대한 폭포일지라도 부드럽고 온화한 관념의 이미지로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서양인이 생각하는 자연과 동양인이 생각하는 자연에 대한 생각의 차이를 확연하게 보여준다.

/곤양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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