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문화재 여행] 사천 다솔사(多率寺)
[경남 문화재 여행] 사천 다솔사(多率寺)
  • 박철홍
  • 승인 2015.04.20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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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년 역사 간직한 고찰…녹차 유명해 茶寺로 불리기도
적멸보궁

사천 곤명면 봉명산 기슭에 자리잡은 다솔사(多率寺)는 ‘많은 군사를 거느린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풍수지리학적으로 보면 대장군이 나오는 터이다.

한글 이름만 듣는다면 소나무가 많은 절이라고 오해할 수 있다. 하지만 다솔사를 찾아가면 이 말도 틀린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있다. 다솔사로 오르는 길에는 소나무와 편백나무, 삼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이들 나무 사이를 걷다보면 큰 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어금혈 봉표(御禁穴 封標)라고 적혀 있는데 ‘어명으로 다솔사에 묘자리를 금지한다’는 의미다. 1890년 당시 지역 유지가 이곳이 풍수지리적으로 좋다는 말을 듣고 무덤을 만들려 하자 지역민들이 반대 상소를 올렸다. 이에 고종이 지역민들의 뜻을 받아들여 이곳에 표지석을 세웠다.

울창한 숲길을 지나 주차장에서 연결된 돌계단을 올라가면 처음으로 마주치는 건물이 대양루(大陽樓)이다. 대양루는 정면 5칸 측면 4칸에 전체 길이가 13m에 이르는 2층 누각 맞배지붕 건물로 고졸한 멋이 느껴진다. 영조 24년(1748) 세워졌으며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83호이다. 이 건물은 신도들에게 설법을 하거나 불구(佛具)를 보관하는 곳으로 이용됐다. 지금은 2층에 차(茶) 전시관을 마련해 각종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대양루
대양루 맞은편으로 절의 본전인 적멸보궁이 있는데 본래 대웅전이었다. 1979년 옆 건물인 응진전을 수리하다 탱화 뒤 벽에서 사리 108개가 나오자 대웅전을 적멸보궁으로 증·개축한 뒤 사리를 적멸보궁에 모셔놓았다고 한다. 대개 적멸보궁에는 불상이 없는데 이곳에는 잠든 듯 바닥에 기대 누워있는 와불상이 모셔져 있다. 건물 뒤로는 사리탑이 마련돼 있어 소원을 빌 수 있다.

적멸보궁 오른쪽에 위치한 응진전은 만해 한용운이 머물며 수도한 곳이다. 일제강점기 다솔사는 항일기지 역할을 했다. 만해뿐 아니라 독립운동과 교육 활동을 활발하게 한 김법린(1899~1964)과 최범술(1904~1979), 불교철학을 연구하고 교육한 김범부(1897~1966) 등이 은거했다. 소설가 김동리는 1936년부터 1940년까지 이곳에 머물며 야학을 세워 농촌계몽운동을 펼쳤다고 전해지고 있다. 김동리가 예전 국어교과서에 수록된 단편소설 ‘등신불’을 이곳에서 썼다는 얘기도 있으나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사리탑과 녹차밭
적멸보궁 뒤에는 녹차밭이 펼쳐져 있다. 녹차 애호가들이 다솔사를 ‘다사(茶寺)’라고 부르는 이유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녹차를 ‘반야로차’라고 하는데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다 출가해 스님이 된 최범술이 인근에서 자생하던 차나무 씨를 받아 차밭을 가꾼 것이 시초이다.

본격적으로 차밭을 조성한 인물은 1960년대 주지였던 효당스님(1904~1979)이다. 효당 스님은 사천 출신으로 1916년 다솔사로 출가해 만해를 당수로 하는 비밀결사인 만당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했다. 1960년 이후 다솔사를 다시 찾아 원효사상과 다도(茶道) 연구에 전념했다.

다솔사에서 왼쪽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2㎞ 정도 올라가면 보안암(普安庵)이라는 암자를 만날 수 있다. 이 곳에는 고려시대 만들어진 석굴이 있는데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돼 있다. 고려 후기 왜구의 노략질이 갈수록 심해지자 백성들이 불법의 힘으로 왜국를 격퇴시키기 위해 지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보안암 석굴은 규모가 작고 솜씨도 거칠지만 돌을 쌓아 축조했다는 점에서 경주 석굴암과 닮았다. 한 사람 정도 겨우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석굴 내부로 들어가면 석조여래좌상과 16나한상을 볼 수 있다.

 
어금혈봉표
◇다솔사의 역사

조계종 제14교구 본사인 범어사 말사인 다솔사는 경남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절이다.

신라 지증왕 4년(503) 조사(祖師) 연기(緣起)가 영악사(靈岳寺)라 하여 처음 세웠다. 선덕여왕 5년(636) 부속건물 2동을 건립하고 지금의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후 문무왕 16년(676) 의상대사에 의해 영봉사(靈鳳寺)로 고쳐졌다가 신라말기 도선국사가 다시 다솔사로 바꿔 불렀다.

이후 다솔사는 고려 공민왕(1351~1374)때 크게 증축됐으나 임진왜란때 절반이 불타고 말았다. 숙종 12년(1686)에 다시 중건됐으나 1914년, 6·25전쟁때 또 다시 화재로 소실됐다. 이후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박철홍기자 bigpen@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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