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설전 앞에서
무설전 앞에서
  • 경남일보
  • 승인 2015.05.31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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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영순 (수필가·노선생논술학원장)
노영순

며칠 전 불국사에서 서너 시간을 홀로 보내야 하는 상황을 맞았다. 진리는 둘이 아니라 오직 하나라는 불이문을 들어선다. 나 홀로 여행객들은 대부분 셀카봉을 필수품으로 가지고 다닌다. 나도 청운교와 백운교 앞에서 셀카를 찍었다. 아직도 보수 중인 석가탑 대신 다보탑을 돌고 또 돌아본다. 관세음보살을 모신 관음전과 비로자나불을 모신 전각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잠시 기웃대다 돌아섰다. 그렇게 무설전으로 왔다.

無設¡ 말이 필요 없음이다. 부처님이 제자들 앞에서 설법하셨으나 너무 어려워 아무도 그 뜻을 모르니 말없이 연꽃을 들어보이셨다. 부처의 손에 들린 연꽃 한 송이에는 천 마디 말보다 더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염화시중의 미소요, 교외별전 (郊外別傳)이며 불립문자(不立文字)이다. 이것이 바로 이심전심의 비법인 것이다. 진리를 들어내는 데는 문자나 경전이 필요 없다는 뜻이다. 오해를 부르고 갈등을 낳는 수 많은 말보다, 한 송이 꽃을 보고 깨닫는 것이 진리임을 알게 한다.

하지만 말을 하지 않고도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경지를 필자는 모른다. 다만 하고 싶은 말을 못할 때의 억울함만은 너무나 잘 안다. 내게 상처를 주었던 누군가에게 꼭 해야 했을 말이 있었다. 독설을 남기고 떠나는 누군가의 뒤통수에 하지 못했던 말이 있었다. 은근한 말장난으로 여러 사람 앞에서 무안을 당하고 집에 돌아와서야 대응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던 경험도 있었다. 오늘 그 말을 모아 소망의 돌탑 위에 가만히 얹어놓는다. ‘제가 안 했어요. 저도 하고 싶어요. 저 주세요’ 하고 싶었으나 용기를 못냈던 말들을 모아 무설전의 풍경 소리에 실어 보낸다.

불국사 경내를 한 바퀴 돌아 다시 무설전에 앉아계신 부처님 앞에 선다. 조금 전에 바람에 실어보냈던 나의 말들이 다시 날아온다.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아이들 앞에서 떠들었던 그 많은 시간 동안 내가 뱉어낸 말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여기도 틀렸구나. 도대체 네 글쓰는 실력은 언제 늘 거니’ 내 가슴의 상처는 아프면서 남의 가슴을 헤집었던 말들은 왜 몰랐을까. 내게 날아오는 화살만 보고 남에게 날아가는 내 독화살에는 눈을 감았던 지난 날들을 무설전 앞에서 아프게 기억한다. 부처님께 합장하며 가섭의 미소를 생각한다.

최소한의 말로 최소한의 주장만 하며 살겠나이다.

독설 대신 부드러운 눈빛만으로 최소한의 나를 드러내보이겠나이다.

다시 불이문을 지나 토함산을 오르는 발걸음이 가볍다. 석굴암에서 들려오는 큰 북 소리와 함께 늦은 벚꽃과 진달래가 진 자리엔 새잎에 돋았다. 오월이 가고 있다.

노영순 (수필가·노선생논술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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