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에서] 획으로 세상을 바꾸다
[교단에서] 획으로 세상을 바꾸다
  • 경남일보
  • 승인 2015.06.07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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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명영 (명신고등학교장)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 청나라는 강희·옹정·건륭제의 3대에 걸쳐 최대 전성기를 누리는 데, 그 원인으로 후계자 선정제도를 꼽고 있다. 태자를 미리 세우지 않고 황자들로 하여금 효성과 우애, 공손과 검박함을 기준으로 검증받게 하였다.

강희제는 이십여 명의 황자를 두었다. 우여곡절 끝에 넷째 황자인 윤진(옹정제)이 즉위하였는데 유조의 내용을 고쳤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강희제는 죽기 전에 태감에게 힘겹게 유조를 남긴다. ‘傳位十四子’(열넷째에게 재위를 물려준다)이라고. 그런데 윤진은 十에다 一의 한 획을 그어 ‘어디로 于’로 바꾸어 재위를 넘겨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김진명의 소설 ‘살수’에서 우중문이 별동군에게 총공세를 명하려는 순간 막사로 사신이 찾아들었는데 을지문덕이다. 이미 여러 전투에서 이겨 공이 높으니 만족할 줄 알고 돌아가라고 회유하며 양광(수양제)에게 전하는 편지를 주고 적진을 유유히 빠져 나온다.

살수에서 30만 명의 별동군은 삽시간에 수장되며 우중문과 우문술은 수천의 군사를 이끌고 양광 앞에 꿇어 사죄하면서 을지공이 쓴 두루마리를 건넨다. 내용은 ‘적을 잡기 전에 집안의 도둑을 잡는 게 이치인즉, 급히 낙양으로 돌아감이 어떠하시오…’이다.

배석했던 유사룡이 받아 읽더니 손가락으로 글자를 짚는데 落陽이로다. 수나라 수도는 洛陽이건만 洛에 4획의 十十을 씌워 落으로 되니 ‘낙양이 떨어진다’이다. 이를 을지공의 단순한 오기 또는 신묘한 기략으로 볼 것인가.

양광의 얼굴색이 몇 번이나 붉으락푸르락하더니 철군을 명하였다. 을지공이 적어 보낸 ‘落’자는 수양제의 마음을 평양에서 낙양으로 날려 버린다. 왜냐하면 양광은 아버지 양견(수문제)의 전철을 밟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중국을 통일한 양견은 시경 ‘한혁편’에 나오는 하·은·주의 정통을 이은 서주가 고구려의 모태인 고조선과 국경을 협의하고, 한후(韓後)가 서주를 방문했을 때 왕의 질녀를 내줘 융숭하게 대접했다는 구절에 자존심이 크게 상해 고구려를 복속시키려 무모하게 군사를 일으켜 청야전술에 대패하자 내부 혼란이 야기되고 마침내 참혹한 최후를 맞게 되었다.

획으로써 十을 于 및 洛을 落으로 하여 황위가 바뀌고, 고구려 백성을 전쟁에서 구하게 된 것이다. 실로 글자의 적확성을 알게 한다.

 
안명영 (명신고등학교장) 교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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