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산에서
왕산에서
  • 경남일보
  • 승인 2015.06.14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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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영순 (수필가· 노선생논술학원장)
노영순
아침에 일어나니 목이 오른쪽으로 잘 돌아가지 않는다. 쑥뜸을 몇 장 뜨고 구형왕릉이 있는 왕산으로 간다.

구형왕은 가야의 마지막 왕으로 오직 백성의 안위를 염려해 신라군에 나라를 내어준 후 이곳에서 한많은 생을 마감했다. 그 뜻이 너무 높아 이곳에는 나무 한 줄기도 뿌리를 내리지 않고 참새 한 마리도 날아서는 넘을 수 없다 한다. 스스로 내린 마지막 왕이란 숙명의 굴레에 갇혀 날마다 분노하고 울부짖으며 오욕의 세월을 살았을 구형왕의 삶은 얼마나 치열했으랴.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이 깊은 산중에 들어야 했던 고단한 삶에서 무엇을 마음놓고 즐길 수 있었으며 무엇을 누렸겠는가. 왕산에 오면 돌무덤을 한 바퀴 돌며 가신 분의 명복을 빌고 나의 삶을 성찰한다. 하루라도 헛되이 보낸 시간은 없는가. 구형왕의 육신을 내리누르고 있는 돌의 무게는 내가 허비하는 시간만큼이나 무겁고 안타깝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두 개다. 객관적 시간과 심리적 시간이 그것이다. 객관적 시간이란 시계바늘이 가리키는 것으로 셀 수 있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다. 반면 심리적 시간은 주관적이라 헤아릴 수 없다. 일생을 얼마나 충실하게 사느냐를 가늠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객관적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잠을 줄이고, 느리게 걷기를 거부해왔다.

산청 동의보감촌에 있는 한방병원은 일요일도 진료한다기에 갔더니 젊은 한의사가 할머니들을 주욱 앉혀놓고 침을 놓고 있었다. 나도 끼어들어 진맥을 청했더니 손목을 한참이나 잡고 있다. 이윽고 “너무 빡빡하게 사시는군요” 한다. 무슨 뜻일까? 의사는 대답 대신 뜻모를 웃음만 흘린다.

미진한 마음으로 돌아오는 길, 차는 굽이굽이 이어진 길을 천천히 돌아나간다. 안전밸트를 맺건만 몸이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 제멋대로 흔들린다. 어떻게든 몸을 바로잡으려 천장에 매달린 손잡이를 잡고 용을 쓰노라니 불편한 목이 신경쓰여 얼굴까지 잔뜩 찌푸려진다. 빡빡하다는 말이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순간 차가 심하게 덜컹거리더니 의자 시트가 뒤로 젖혀졌다. 아! 그곳에는 하늘이 있었다. 저녁 노을이 저리도 붉게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순간 나는 애쓰던 몸짓을 그만 두어버렸다. 다리도 손에도 힘을 놓아버렸다. 길을 따라 몸이 흔들린다. 구부러진 길 모양에 따라 몸을 맡기니 한결 편안해진다. 그래도 길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하늘은 여전히 푸르다. 길을 따라 나의 시간도 흘러간다.

어차피 흔들리기는 마찬가지. 나 빡빡하게 아니 살아도….

노영순 (수필가· 노선생논술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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