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칼럼] 유월의 숲
[경일칼럼] 유월의 숲
  • 경남일보
  • 승인 2015.06.25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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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숙자 (시인)
황숙자 (시인)

오랜만에 나선 도서관 길은 녹음이 무섭게 우거지고 그늘이 깊어져 숲이 터널을 이룬다. 봄날 환하게 길을 열어주던 그 많던 꽃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사라져버린 꽃들의 그림자를 따라 언덕배기 도서관 벤치에 앉아 내려다보는 세상은 참으로 어지럽다. 이리저리 이어지고 뻗어나간 길들, 세상의 저 수많은 길들의 끝은 도대체 무엇을 향해 있을까. 도서관은 기말고사 기간인지 학생들로 붐비고 책속에 얼굴을 묻고 있는 모습이 기특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얼마 전 스탠포드대와 하버드대에 동시 합격했다는 천재소녀 얘기가 해프닝으로 끝나고 거짓말을 한 배경이 궁금했는데 짐작대로다. “작은 연못에 사는 큰 물고기는 물 밖에 또 다른 큰 물고기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나는 그저 수많은 별들 중 하나일 뿐이라는 자부심에 큰 타격을 받아 성공하는데만 익숙해져 있던 학생들로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 된다는 것이다. 결국에는 기대에 차서 뒷바라지한 부모들과 주변의 과도한 시선으로 인한 중압감에 시달려 당장 탄로 날 거짓말 합격이라는 일을 꾸민 것이다.

그러나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도 가고 취직을 하고 소위 말하는 성공을 했다 해도 빛나는 성공의 존재감이 전 생애의 행복을 보장해 줄 수 있는지 생각해 본다. 성공이 행복을 보증해 주는 것이라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 어쨌든 내 자식 일이라면 성공한 인생보다 행복한 인생을 선택해서 살아가길 바랄 것이다.

서울 유명 대학을 나와서 좋은 직장도 버리고 지리산 언저리에 터를 잡고 산나물도 뜯고 약초도 가꾸는 고생을 사서 하는 지인이 있다. 몸 고생이 마음고생을 다스리고 사는 셈이니 아침마다 눈 떠는 것이 행복이라고 한다. 꿈이 소박해지면 일상도 소박해지고 걱정거리도 소박해진 셈이다. 살아 갈수록 나는 사람이든 무엇이든지 과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것에 마음이 쏠린다. 살림살이도 채우는 것보다 비우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다. 주변을 정리하고 깨끗하게 정돈하는 자세와 무언가를 자꾸 보태고 덧칠하는 대신에 여여한 여백으로 두려는 의지는 나이 들어갈수록 가질 미덕이다.

어쩌면 행복하기는 아주 쉽다. 가진 걸 사랑하면 되는 것이다. 내가 가진 것들에 만족하고 조급해하지 않고 살면 되는 것이 아닌가. 상처 없는, 실패 없는 인생이 어디 있는가. 좌절과 고통에 얼마나 성숙하게 대처하고 사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순간에는 죽을 것 같은 고통이라도 의연하게 대응하고 지나고 보면 상처는 내 영혼을 강하게 담금질한 풀무가 되어 있었다.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한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부디 도서관에서 열공하는 저 아이들의 앞날이 성공의 방향만 쫓아서 달리기보다는 행복의 지침계를 잘 조절하고 속도보다는 방향을 잘 잡아서 살아가길 바란다. 땡글땡글 볕에 단단해지는 것들, 여름이 건너오는 시간들을 본다. 나는 나에게 위로한다. 덥다고 투덜거리지 마라, 힘들다고 엄살 부리지 마라. 땀 흘리는 시간이 아름다운 것이다. 유월의 숲을 가르는 바람은 끝내 달콤할 것이다.

 

황숙자 (시인) 경일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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