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레길 단상
둘레길 단상
  • 경남일보
  • 승인 2015.06.28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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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영순 (수필가·노선생논술학원장)
노영순
어느샌가 높은 산보다는 둘레길 걷기가 좋아졌다. 아파트 후문을 지나 30분이면 봉수대가 있는 망진산 정상에 도착한다. 진양호와 남강, 촉석루가 눈앞으로 다가온다. 이어지는 둘레길은 내동으로, 경상대로, 가좌동으로, 어디로든 발길가는 대로 안내한다. 그날의 일정에 따라 조금 길거나 짧은 코스를 선택하면 된다.

완만하고 적당한 넓이의 길을 따라 10㎞쯤 걸으면 망진산과 가좌산을 한바퀴 돌아 원점회귀를 할 수 있다. 조금 올라간다 싶으면 바로 완만한 내리막이 나타나니 산 정상을 올라갈 때처럼 힘이 들지 않는다. 쉼터도 많아 쉬엄쉬엄 가도 된다. 누가 앞질러가도 그만이다. 유치원생들이 소풍이라도 나온 날이면 옆길로 에돌아가도 좋다.

높은 산을 오를 때는 낙오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하지만 둘레길은 섣불리 정상을 탐하지도 않고 쉽게 내려가지도 않는다. 그래서 둘레길에는 높이 오른 자의 오만함이 없으며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적당한 높이의 산자락을 끼고 돌다보면 자연스레 시선은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게 된다.

‘절대 1등 할 생각 말고, 응? 그저 2등만 하고 오니라 ’

학교 대표로 뽑혀 군에서 주최하는 글짓기 대회에 나가는 날, 어머니께서 초등학생인 내게 하신 말씀이다. 무슨 대회건 나갈 때마다 어머니의 이해할 수 없는 당부를 들어야 했다. ‘아니, 나, 꼭 일등할 건데’ 그 때마다 철없는 나는 1등을 고집하여 어머니의 지청구를 들어야 했다. 그러다 어머니의 당부처럼 되는 날이면 애꿎은 엄마 탓을 하며 놓친 상장을 아쉬워했다. 필자보다 윗세대인 전직 대통령도 어머니께 늘상 듣고 자란 말씀이 ‘중간만 해라’였다는 일화를 읽은 적이 있다.

코끼리를 연구하는 각국의 학자들이 모여 코끼리에게 할 질문을 만들었다. 그런데 한국 학자는 코끼리에게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겠다고 밝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지나친 겸양을 예의로 알고 자란 탓이다. 이처럼 우리 세대는 중간을 중용으로 알고 자랐다. 그것을 미덕이요, 도덕으로 간직하고 살아왔다. 중간과 중용의 경계선에서 갈등한 적마다 듣게 되는 속담이 ‘모난 돌이 정 맞는다’였다. 이 속담은 표나지 않게 조용히 사는 것이 제일이라는 강력한 교훈을 담고 이제껏 우리의 행동을 제약해왔다. 진정한 중용은 모남을 엇나감이 아니라 다름으로 보는 것이 아닐까. 둘레길을 걸을 때면 오늘 내가 걷는 이 길은 중간일까, 아니면 중용일까를 생각하는 묘한 버릇이 생겼다.


노영순 (수필가·노선생논술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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