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책상
꿈꾸는 책상
  • 경남일보
  • 승인 2015.07.12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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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영순 (수필가·노선생논술학원장)
노영순

필자에게는 30년을 훌쩍 넘긴 책상이 하나 있다. 이사해 간 집 베란다에 버려져 있었던 것으로 책과 공책을 놓으면 그만인 아동용 책상이다. 낡은 것으로 치자면 당장 내다놓아도 누구 하나 거들떠보는 이가 없을 듯하다.

책상을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이 새롭다. 무심코 들여다 본 서랍 속에 들어있던 광고지 이면에 가득 쓰인 서툰 글씨가 나를 사로잡았다. ‘거· 너· 더 ·러 ……’ 전 주인 할머니의 글씨인 듯싶었다.

할머니는 그 연륜에 무엇을 위해 글을 배웠을까? 이 작고 낡은 책상에서 돋보기를 고쳐 써가며 글씨를 썼을 할머니의 모습이 떠오르자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 차올랐다. 책상을 내 것으로 하기로 마음먹고 녹슨 다리를 걸레질하였다. 포플린 식탁보에 풀을 먹여 흉터투성이의 얼굴을 덮고 앙상한 다리도 가려주었다. 책상 위엔 즐겨 읽는 책 한 권이 놓이면 그뿐 다른 장식은 필요없었다.

그 때부터 창가에 놓인 책상은 늦은 밤이면 나와 만났다. 이 책상에서 아이들에게 편지를 쓰고 가계부와 일기를 썼다. 남은 생을 풍부하게 변모시켜 보리라 소망했던 곳도 이 책상 앞에서였다. 나태가 찾아올 때마다 책상은 우뚝 서서 나를 부른다. 이 책상은 단순한 의미의 책상이 아니라 내 삶의 동반자였다. 끝없는 생활의 활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자기 만족을 충족시켜 주는 정신적인 지주 역할도 해주었다. 행복은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소박한 깨달음도 얻었다.

내게 맡겨진 삶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고 책상에 앉으면 수많은 상념들이 뒤따라와 글을 쓰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삶의 참된 가치와 의미가 낡은 책상 위에서 반짝거리며 오랜 세월 동안 나를 행복하게 해주었다. 행복을 느끼는 가치 기준은 사람마다 나름이겠지만 내겐 책상을 만나는 순간이 더없이 소중하고 행복했다. 아이들도 번듯한 자기들의 책상을 두고 서로 엄마 책상에 앉기를 고집할 적이 많았다.

작은 책상 위에서 아이들과 함께 행복을 꿈꾸던 시절은 가고 아이들은 내 곁을 떠났다. 날이 갈수록 삐걱거리는 책상은 제 몸무게조차 견디지 못한다. 이제 나는 제 수명을 다한 책상과 이별하려 한다. 함께 한 세월이 꿈처럼 행복했다고, 이제는 홀로라도 주어진 길을 가겠다고, 책상 앞에서 나 자신에게 약속한다.

노영순 (수필가·노선생논술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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