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4 (53)
진작 찾아뵙고 인사라도 드려야할 텐데, 애가 속 썩히지나 않는지…. 전에 어머니가 자신을 찾아오면 비굴스럽게 자근거리는 목소리로 주인에게 하던 인사말이었다. 보호자격이 되면 빈 말 인사라도 해야 되는 것을 깨달은 것은 공장에서 아이들을 거느리게 되면서였다. 그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없애고 상호 신뢰의 길을 트는 일이었다. 들고 간 선물꾸러미를 내밀자 ‘아이 뭘 이런 걸,’ 하면서 받아 든 물건과 상대의 형편정도를 가늠해서 대하는 눈길은 공단지역의 닳고 닳은 셋방 주인의 습성이 그대로 배어났다.
습습한 냉기가 고여 있는 모퉁이 방은 쥐죽은 듯한 적막으로 괴괴하게 눌려있었다. 몸채의 뒷벽을 스레트로 덮어 급조한 날림 방이다. 채광용으로 끼워 놓은 한 장의 나일론 슬레이트에서 뿌연 햇빛 한 조각이 내려 와 컴컴한 부엌 명색을 비추고 있는.
“아가씨 언니가 왔어”
파란색 비닐 슬리퍼가 기우뚱하게 세워져 있는 부뚜막을 짚으며 주인여자가 노크를 했다.
양지가 열어본 찬장 속의 밥을 보고 주인여자가 생색내는 소리를 했다.
“이상하네, 내가 아까부터 그게 있었는데도 밖으로 나가는 건 못 봤는데”
기척이 없는 방문으로 눈을 주며 주인여자가 갸웃 고개를 기울어뜨린다.
“됐습니다. 바쁘신데 저 때문에 괜히 일도 못하시네요”
양지는 주인여자의 너스레가 부담스러웠다. 돌아가 달라는 뜻으로 목례를 보내자 주인여자도 같이 허리를 꾸부정해 보인 후 양지가 준 선물상자를 안고 모퉁이를 돌아갔다.
주인여자의 발소리가 사라지자 양지는 정남의 방문을 열었다. 미닫이가 열리자 약간의 화장품 냄새와 뒤섞인 불기 없는 방 특유의 고리타분한 냄새가 밀려 나왔다. 어둠에 눈이 익자 양지는 멈칫하며 방으로 들어가려던 자세에 제동을 걸었다. 정남이 답지 않은 전혀 예상 밖의 방안 풍경이었다. 아무렇게나 뒹굴었던 흔적이 역력한 이부자리가 그대로 펼쳐져 있는 것은 몸이 아프다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함부로 벗어 던진 옷가지며 널려있는 잡지책이며 책가방. 생긴 모습에 따라 정리정돈도 깔끔하여 어릴 때부터 곧잘 어머니를 도와 본의 아니게 ‘더펄개’ 호남을 욕먹게 하던 아이였다. 가스나가 너무 깔끔하면 복이 없는 거라고 어머니가 나무라도 정남의 천성은 고쳐지지 않았다. 최 정남이라는 발음을 잘못들은 주인여자는 이미지가 비슷한 다른 아가씨의 방으로 인도한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갖는데 부뚜막에 놓여있는 낯익은 냄비 한 개가 양지의 눈길에 들어왔다. 양지의 자취방에서 어머니가 챙겨 간 빨간 줄무늬가 몸체와 뚜껑에 둘려있는 냄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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