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5 (54)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5 (54)
  • 경남일보
  • 승인 2015.12.20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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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지원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5 (54)

자신 있게 방으로 들어간 양지는 방바닥에 놓여있는 책가방을 끌어당겨 노트를 꺼내 보았다. 청운여자고등학교 2215 최 정남. 순간 무언가 뒤에서 덮쳐오는 느낌이 들어 재빨리 고개를 돌려보았다. 구석에 있는 비키니 옷장이 부스럭거리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순간, 양지의 얼굴에 벙긋 반가운 웃음이 피어올랐다.

“정남이구나, 정남아, 정남이 맞쟤?”

꾸무럭거리는 움직임이 숨죽이는 진정되는 옷장을 잡아 젖히자 노란색 지퍼가 보였다. 지퍼를 열려하자 황급히 안에서 잡아당기는 동작이 울근불근 밖으로 드러났다. 양지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삼키며 지퍼를 열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너, 언니가 왔는데 이랄 수 있나? 언니 보고 싶지도 않아?”

장난을 끝내고 곧 모습을 드러내리라 여겼던 예상은 빗나가고 정남의 저항은 계속 되었다. 버티는 동작이 집요해지고 노골적으로 거칠어진 숨소리까지 안에서 새어나왔다. 언뜻 불길한 예감이 양지의 뇌리를 스쳤다.

“너, 무슨 일 있구나. 얼굴 다쳤어? 어서 네 얼굴 좀 언니한테 보여 줘. 얼굴을 다쳤구나, 우짜다, 기계에 그랬나? 에나 얼굴 맞나? 많이 그래?”

“아이다, 아니라니깨!”

비로소 만감이 포함된 목멘 울음이 터져 나오고 옷장이 흐느적 가라앉았다. 양지는 그제야 정남의 행동에 이해가 갔다. 그것은 그리움이 응축된 노여움이었다. 반가움에 겨워 앵돌아진 투정이었다. 와 보았자 겉늙고 초라한 모습으로 한숨밖에 들려주지 않던 어머니였지만 양지 자신도 그리움을 감추며 공연히 골을 내곤 했던 적이 있었다. 더구나 정남은 막내둥이 응석꾸러기가 아닌가. 방심할 틈을 주었다가 얼른 잡아채고 지퍼를 열자 옷 속에 구겨 박혀있는 정남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라모 와 그라노. 언내도 아임서”

양지는 땀에 젖은 정남의 머리칼을 손바닥으로 훔쳐 올리며 먼저 얼굴을 살폈다. 얼굴을 다친 건 아니어서 우선 안심이 됐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자 넓은 이마와 오목조목 예쁜 눈과 코 입이 수줍음을 담고 샐쭉 돌아갔다. 윤기 없이 푸석한 피부에 광대뼈가 쑥 불거져 나온 게 눈에 걸려 다시 한 번 더 보려고 뺨을 돌리자 정남은 한사코 거부하며 언니의 눈길을 피해 고개를 외로 돌렸다.

“많이 아픈 가베? 오데가 얼매나?”

양지는 혹시 정남이가 앓고 있을지 모르는 직업병을 총총 떠올리며 다그쳐 물었다.

“암시랑토 않고 괘안타캐도 자꾸 그란다, 그냥 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우물우물 변명을 늘어놓는 목소리가 긍정보다 더한 의구심으로 양지의 불안감을 부추겼다. 그런 중에도 제법 둥실해진 허리와 어깨의 근육이 생각보다 성숙해보여 일견 대견함도 없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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