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5 (55)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5 (55)
  • 경남일보
  • 승인 2015.12.20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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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지원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5 (55)


낮에는 직장에 다니고 밤에는 학교를 다니는 고된 일상에서나마 마음도 몸도 자란 증거다. 동생 하나 데려다 정규학교 뒷바라지를 못할 형편도 아니면서 모른 듯 두고 보았던 데 대한 좀 전의 가책도 조금 느슨해졌다.

“참말이지?”

“에나지 그럼, 난 뭐 언제나 애긴 줄 아나, 일 하기 싫어서 꾀병 부린 걸. 언니도 꾀병 부리고 싶을 때 없었나?”

그래 나도 그럴 때 있었지. 정남의 당돌한 반박이 흔쾌하고 신선한 감동을 몰고 왔다. 이 귀여운 계집애 같으니라고. 양지는 와락 정남을 껴안고 흔들어 주었다. 열여덟 소녀의 보드라운 육체가 새치근한 몸냄새와 함께 혈육의 정감을 뭉클 이끌어 냈다.

“누워라, 오늘은 언니가 시중 들어줄께”

정남을 억지로 눕혀 놓고 양지는 가지고 온 멜론을 깎았다. 미안한 듯 우물거리며 사양했지만 막상 등이 방바닥에 닿자 쌓인 피로에 절어 있었든 듯 정남의 몸은 곧 힘없이 까부라졌다.

“아부지하고 옴마는 한 번 다녀가싰나?”

“응, 접때 엄마만 한 번, 억, 으윽…”

양지가 내민 메론 한 조각을 받아서 무심코 베어 물던 정남이 왈칵 헛구역질을 했다. 동시에 별스럽지 않게 여기고 있는 양지를 힐끗 쳐다보는 정남의 눈길에서 묘한 경계심이 내비쳤다. 그제야 뭔가 심각해지는 양지의 더딘 인지력을 채질하듯 정남이 다시 솟구치는 토악질을 손으로 막으면서 밖으로 뛰어나갔다.

하수도 구멍에다 코를 박고 연신 헛구역질을 하는 정남의 엉덩짝이, 확인되지 않은 어떤 의문으로 쿵 내려앉는 양지의 시야에서 무한 확대되어 올랐다.

다음다음 날, 정남을 데리러 다시 대구로 내려갔지만 양지는 헛걸음만 쳤다. 전날처럼 골목에 앉아 동네 아낙네들과 부업을 하고 있던 주인여자가 편지 한 장을 건네주었다.

--. 미안해 언니. 하지만 지금 새삼스럽게 언니의 짐이 되느니 내 길을 가려는 용기에 손뼉을 받고 싶어. 여자는 한 남자의 날개 밑에 묻혀서 보호를 받으며 그에게 입힐 옷을 빨고 그에게 먹일 음식을 만들면서 행복을 짓는 거라고 엄마가 들려주던 말이 생각 나. 모르겠어, 아직은 뭐가 뭔지. 하지만 창규씨는 아직 나이는 어리지만 나한테 아주 잘해주고 착해.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아끼고 위해주는 창규씨와 함께라면 세상 끝까지 어디든 갈 수가 있을 것 같아. 미안하다면, 언니랑 같이 가서 재미있게 열심히 살아보자는 언니의 다짐을 배반하고 떠나지 않으면 안 되는 내 처지가 안타까울 뿐이야. 그렇지만 언니, 언니 말대로 대학가서 훌륭한 멋진 여성이 되는 것도 좋지만 행복해 보일께. 엄마처럼 슬픔과 고통 속에서 살지 않아야 된다는 언니들의 말, 꼭 명심할께. 행복해 보일께, 정말이야 언니, 꼭 이야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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