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4 (56)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4 (56)
  • 경남일보
  • 승인 2015.12.31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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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지원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5 (56)

어디론가 자취 살림까지 옮겨버린 빈 방을 확인하면서 양지는 차가운 미소를 지어 올리며 입술을 빨아들였다. 홀로 설 것을 기대하며 방치한 동안 저 나름대로 길을 찾는구나 싶은 대견함도 없지 않았지만 세상을 누구나 살 수 있는 곳으로 호락호락 생각하는 얕은 소견머리에는 얄미움이 더 크게 일었다.

양지는 굳이 풀어헤치지 않아도 밀려오는 자신의 지난날을 어쩔 수 없이 반추해 본다. 저마다의 목표에 따라 내리는 역은 다를망정 어쩔 수 없이 같은 노선의 차를 탄 비슷비슷한 행려 객들…. 아주 좋은 차를 갈아타고 싶은 열망을 누군들 갖고 있지 않을까. 그렇지만 타고 난 운명의 토양 아래 노선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 게 인생이다.

양지가 눈을 감자 지그시 감은 망막으로 잊어버렸던 지난날이 필름처럼 풀려서 천천히 밀려왔다. 바보, 세상은 아무에게나 좋은 자리를 내어주지 않아.

이름, 최 쾌남. 나이, 열다섯 살. 하는 일, 아이보기….

책을 든 손을 흔들면서 주인집 오빠가 뒤꼍으로 불렀다. 고등학교 이학년인 오빠의 얼굴에는 익은 수수알갱이 같은 여드름이 건드리면 톡 터질 듯이 다닥다닥 돋아나 있다. 여드름쟁이 그 오빠는 선생님인 제 부모의 눈을 피해 늘 만화책이나 이상한 책들 밖에 보지 않았다. 쾌남은 씻고 있던 귀저기를 놔두고 오늘도 어른들 몰래 익은 여드름을 짜달라는 거겠지 짐작하면서 오빠를 따라갔다. 할머니가 찾으면 어쩌려고, 겁내는 쾌남의 등에다 정답게 손을 걸치고 오빠는 연탄광 속으로 들어갔다. 오빠는 이상한 그림이 있는 영어책을 보여주며 읽어 주겠다고 했다.

‘짐과 안나는 숲속으로 들어갔다. 고요한 숲속에는 바람소리와 새소리만 들려 올 뿐 사람이라고는 오직 짐과 안나 둘 뿐이었다. 요술쟁이의 집인지도 몰라, 짐이 말하자, 아이 무서워, 움츠러드는 안나의 어깨 위로 다정하게 짐의 손이 올라와서 감싸주었다…. 짐의 손이 자꾸 흘러 내려 와서…. 겨드랑이를 비집고····점점 앞으로···· 아이 간지러워, 아파····.’

쾌남은 그 순간 두 눈을 찌르는 강렬한 빛과 머리끝이 죄 뽑혀버리는 듯 한 통증을 동시에 느끼며 앞으로 꼬꾸라졌다.

“계집애가 꼬리를 쳤으니 그렇지.”

연탄광 바닥에 패대기쳐진 쾌남의 눈길 속에 주인할머니의 사나운 주먹질이 해머처럼 내리꽂히고 있었다. 아. 우리가 언제부터 이상하게 보였던 것일까. 벌써부터 어른들의 눈길이 주위를 살피고 있었던 것에 대한 놀라움으로 쾌남의 충격은 더 컸다. 친오빠나 남동생이 없었기 때문에 가까이서 접할 수 있는 주인오빠의 말과 행동을 호기심 있게 바라보았고 신기해했을 뿐 결코 나쁜 짓을 한 적 은 없었다. 그렇지만 어른들은 달랐다. 언감생심이라고 했다. 억측으로 부풀리는 어른들의 윽박지름은 점점 강도가 심해지기만 했다. 고등학생 오빠는 어른들이 명령하는 대로 제 방에 틀어박힌 채 죽은 듯이 자취를 감추고 있을 뿐, 쾌남이 편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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