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5 (60)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5 (60)
  • 경남일보
  • 승인 2016.01.03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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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김지원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5 (60)

“들어봐. 우리 할머니한테 들은 얘긴데 호랑이가 초저녁에 사냥을 나올 때는 거만하게 폼을 잡고 아이 밴 새댁이나 예쁜 아가씨나 했는데, 새벽이 돼서 동쪽이 희붐하게 되면 배는 고프고 허탕 칠 것 같은 예감에 그저 마음이 급해져서 늙은 홀아비나 풍병 든 할망구나, 주문이 마구 치졸해진다는 거야”

현태의 농을 무시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자 기우뚱 중심이 흩어졌다. 찔린 정곡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풀린 다리는 엉덩이를 의자 위로 무너뜨렸다. 자랑스럽지 못한 환경은 또 양지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긴 것을 아니라고 우기는 것도 자괴감으로 망가진 후에는 불가능하다.

“듣기 싫으면 꽁무니 빼더라. 야이 가시나야. 니 진짜로 진주 출신 맞냐? 남편의 충정까지 사랑해서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여사가 언짢아서 넌 아니라고 호적 파려고 들겠다.”

“내가 뭘 어쨌다고 갑자기 논개씩이나?”

“내가 왜 뻣장구같은 널 좋아하는지 말했지? 진주 사람들 특성이 겉으로는 폐쇄적이고 덤덤해 보이지만 한 번 사귀었다하면 쉬이 변하지 않고 깊은 정을 주는 게 좋다고”

“진주에 대해서 잘 아는 척 한다고도 했네”

“우리 외숙모님이 진주댁인데 진주 자랑이, 아니 홍보가 얼마나 심했는지, 애향심이 그만하면 시장님이 표창장이라도 줘야한다고 우리는 막 놀리고 그랬단 말도 했는데 그새 다 잊은 척 하네. 고얀지고. 임진왜란 때 군관민 합동으로 왜적과 맞서 싸우다가 7만 여명이 생목숨을 바쳤지만 패전했고 승전에 취한 왜장과 의암에서 투신한 논개 사당이 촉석루 옆에 있잖아. 여염집 여자들도 죄 나서서 승냥이떼처럼 몰려오는 적들을 퇴치하기 위해 뜨거운 물을 끓이고 앞치마로 돌을 담아 날랐다니, 진주 여자들 충정이나 결기가 얼마나 대단한가 다시 보게 됐다구. 강낭콩 보다 더 푸른 남강 어쩌고 하는 변영노 시가 얼마나 유명해졌는지 너도 말했잖아”

“역사 공부깨나 했네”

“그러엄 내 각시의 고향이니까. 그것뿐일까. 중학교 삼학년 때는 사촌들하고 같이 학생들 등 띄우는 데도 참여했는데. 임진 계사년 전쟁 때 군사들이 성 밖에 있는 가족들께 안부를 적어 강물에 띄운 걸 기리는 민족혼이 배인 행사라는 말을 듣고는 얼마나 감동했는지. 그때 벌써 우리의 만남은 연줄이 드리웠던 거야. 최 양지 듣기 좋으라고 아부성 예찬이 아니라 보석처럼 이름만 좋은 게 아니라 지리적 여건도 얼마나 좋아. 북으로 한 시간여 거리에 한국의 태산 지리산이 터억 품어주고 있지, 남으로 한 시간여만 가면 태평양으로 바로 통하는 청정바다 남해가 있고, 기후 온순하고 농산물 풍부하고 물 걱정 없는 이런 곳이 천정 낙토가 아니고 뭐야. 아, 아름답던 기억이 또 있다. 해마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나면 쌀 몇 됫박을 머리에 이거나 어깨에 메고 예술제 구경을 하러 친척집으로 몰려가는 시골 사람들 행렬도 볼만했지. 우리나라 예술제의 넘버 1호라는 것만도 큰 자랑거리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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