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5 (63)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5 (63)
  • 경남일보
  • 승인 2016.01.10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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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지원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5 (63)

정남이 제일 참기 어려운 것은 일 자체의 실수를 나무라기보다 걸핏하면 ‘이마에 피도 안 마른 것’으로 시작해서 ‘사내 후리는 재주’며, ‘x통만 키워 가지고‘라는 따위의 욕설로 수치심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이런 나날의 반복 속에 어느 틈엔가 정남의 뇌리에는 이대로 죽고 말 거라는 공포와, 도망이라는 그들이 바라마지 않을 듯 한 단어가 구체적인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흐르는 눈물 속으로 행복해 보일께. 언니에게 남겨 놓은 편지가 떠올랐으나 버티고 참아 볼 위안거리는 아무 데도 없었다. 이런 것을 행복이라고 한 약속은 아니었다. 지금쯤 어린 딸을 찾아왔다가 헛걸음하고 돌아갔을 엄마에 대한 면목도 없었다. 매운 시집을 견뎌내면 그만큼 여자로 성숙해지는 거라고 어머니는 호남언니에게도 늘 가르쳤다. 그리고 뱃속에 있는 아이에 대한 두려움과 어쩌다 올 때마다 꾸지람만 듣고 시무룩이 돌아서는 창규에 대한 애틋한 기대를 저버리기도 어려웠다. 들에서 부엌에서 여러 번 쓰러졌다.

동네 사람들 창피해서 못살겠다고 그럴 때마다 시어머니의 구박은 점점 더 거세졌다. 보다 못한 시아버지가 한약 한 재를 지어다 다려 먹으라고 주었다. 그 실낱이 태양광선 마냥 줄기차지는 희망과 기쁨이라니.

마침 그때 어떻게 알았는지 쾌남언니가 찾아왔다. 언니는 나약한 사람은 싫어한다. 거칠고 험한 지경에서라도 남에게 지는 것은 죽는 것보다 못하다, 그런 성격이었기 때문에 ‘쾌남’이라는 호적에 오른 이름도 버리고 제 마음대로 이름을 갈아서 ‘양지’라고 쓰는 언니. 엄마의 성인 강씨까지 붙여서 ‘최강 양지’라고 언니가 일러준 대로 발음해 보면 쾌남언니의 속마음을 단박 읽을 수 있었다. 그런 언니에게는 굳센 모습을 보여야 한다.

정남은 그래서 변명으로 들릴 다른 말보다 먼저 악첩을 꺼내서 언니에게 보였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몰골은 고된 시집살이 때문이 아니라 심한 입덧 탓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래, 고통 속에서도 희망이 있으면 살맛은 더 오진 법이다. 정남의 야윈 어깨를 다독거려 준 언니 최강양지는 정남의 선택을 더 이상 비난하지 않고 물러갔다.

양지는 그때 정남이 가졌을 심정을 미루어 짐작해 보며 자신의 판단력을 흐리게 했던 약첩을 떠올려 보았다.

정말 잘 견뎌 내서 네가 말했던 행복을 일구어 보이겠느냐고 물었을 때 눈물 젖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이던 슬픈 미소를 되짚어 본다. 그 뒤에 정남을 만나러 가서 보았던 김매는 아주머니들을 좀 더 앞서 만났더라면 정남이 당하고 사는 고초를 들을 수 있었고 일이 이렇게 뒤틀리지는 않았을 터였다.

아니, 양지 자신의 감정이 혈육을 향해 좀 더 유연하고 따사롭게 열려 있었던들 그 아픔, 그 외로움을 인내와 극복이라는 상식적인 단어로 간단히 치환해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허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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